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

아름다운 인연

아네모네(한향순) 2025. 6. 18. 21:29

 

아름다운 인연

  한 향 순

  서울에서 남편의 지인이 출판기념식을 한다고 해서 길을 나섰다.

일요일인데다 연말이 가까워서인지 길은 엄청 밀렸고 내비는 자꾸 다른 길을 안내하며 두 시간 후에 도착시간을 알려주었다.

보통 출판기념식에 가면 저자가 호화로운 인맥을 자랑하거나 저자의 업적을 조금은 부풀려서 전달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이런 자리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는데,

남편의 오랜 친구이고 젊은 시절부터 같이 어울렸던 분이라 투덜거리며 참석을 했다.

그러나 막상 식장에 도착하고 보니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이십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식장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서야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올해 주인공은 팔순을 맞았고 45년 전 고등학교 제자와 교사로 만난 이들의 아름다운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오늘 행사를 마련해준 것이라고 했다.

그분의 책에 실린 빵 한 덩어리로 맺은 인연이란 제목 속의 글 내용은 이러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 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 때문에 19년 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장 발장이 빵 한 개로 옥살이를 한 것이 이해되지 않듯이 빵 몇 개로 45년 동안이나

고마워하며 찾아오는 30여 명의 제자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정말 빵 몇 개 때문에만 제자들이 고마워하며 계속 찾아 올 리도 없겠지만

그렇게 에둘러 쓴 저자의 겸손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각박한 세상에서 교사와 제자라는 인연의 끈을 45년이란 기간 동안 잘 가꾸어오며

이런 자리를 만든 그들의 아름다운 인연에 감동을 받았다.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각 분야에서 성공한 제자들이 늙은 선생을 축하하기 위해 멀리서

어려운 걸음도 마다않고 모두 참석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악기 연주와 노래는

물론 각종 재주를 보여주며 식장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이 찡해지는 자리였다.

지난 시절을 회상해보니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선생님이 계셨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B선생님이시다.

성격도 소심하고 학교성적도 중간정도였던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별로 존재감이 없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중학교 진학을 시험을 치러서 가야했던 때여서 6학년이 되고 부터 걱정이 되어 조금씩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산수시험을 잘 보아서 우리학교 대표로 산수경시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나는 겁이 나고 도저히 자신이 없어 울상이 되어 선생님께 나갈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면 되니 걱정 말라며 나에게 용기를 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다행이 시험은 그런대로 보았고 나는 자신감을 얻어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처음 나를 인정해 준 고마운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그 결과로 우리 도시에서 제일 좋은 여중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어렸던 탓일까

선생님께 고맙다는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고 그 속에 무심하게도

기억도 묻혀버려서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산 것이다.

남편의 고교동창인 지인과는 결혼하기 전인 젊은 시절부터 잘 어울려 다녔다.

모두 춥고 가난했던 시절, 광화문이나 명동에서 만나 막막하기만 했던 젊음의 고뇌와 고민들을 이야기하며

커피를 마시거나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 정답이 없는 논쟁을 하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 속에서 의연한 척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팔십이 된 그분을 만나도 별로 늙었다거나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그분이 손수 전달해준 책의 속지에는

늘 젊음을 기억하게 해주시는 고마운 분이라는 문구와 저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지인을 통해서 잊고 있던 우리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추억에 잠길 수 있던 유쾌하고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요즘 초 고령 사회인 일본에서는 과거의 좋은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뇌혈류를 증가시켜서 뇌기능을 활성화 한다는

효과가 밝혀지면서, 추억회상이 인지기능 개선수단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2000년대부터는 회상요법학회가 설립되어 노인들에게 치매예방효과나 활력을 주고,

인지기능 개선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젊은 날을 회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여럿이 모여서 잘 나가던 시절의 직함을 불러주거나 그 시절의 주제로 수다 떨기,

혹은 예전에 즐기던 음악을 같이 듣거나 부르기도 한다. 또한 힘든 젊은 시절을 극복한 경험들을 서로 이야기 하거나

추억이 서린 곳으로 여행을 가는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회상으로 즐거웠던 시절을 이야기 하다보면 어르신들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생긴다고 한다.

우리가 살면서 차곡차곡 쌓은 행복한 추억은 노년을 활기차게 만드는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결국 인생을 잘 살고 있는 사람이고

노년의 부자가 아닐지 모르겠다.

 

<2025년 에세이문학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