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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기/카자흐스탄 출사

에필로그

by 아네모네(한향순) 2015. 7. 27.

 

 

 

눈앞에는 하얀 설산이 떡 버티어 서서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설산을 바라보며 무조건 길을 따라 걸었다. “세상에 초여름에 하얀 설산을 볼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신기해서 우리는 힘든 줄도 몰랐다. 어제 밤 내린 비로 길이 망가져서 버스가 더는 오를 수 없다고 해도 일행들은 흥분한 채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큼이나 걸어야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안내자도 없이 그저 설산을 향하여 묵묵히 걸었다. 뒤에서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압도되어 모두 말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녹색의 초원지대가 끝나고 맞은편 언덕에 붉은 점들이 점점 커지면서 무늬를 그리더니 아예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은 초원이 나타났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것이 양귀비 군락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선두대열에서 양귀비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연이어 환호성들이 울려 퍼졌다. 멀리서 붉게 보이던 언덕이 모두 양귀비로 뒤덮인 초원이었다. 하얀 설산이 빙 둘러싼 초원에 빨간 양귀비가 만개한 모습을 보자 ~ 여기가 천상의 화원이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어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은 뒤, 처음 만나는 비경이기에 더욱 감동이 컸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밤새 내린 비가 높은 산악지대에서는 눈으로 변해 도시를 둘러싼 산들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설산들이 바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내려온 텐샨산맥인데, 우리말로는 천산산맥이라고도 한다.

 

 

 

 

 

 

길은 끝날 것 같지 않게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하얀 설산이 웅장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고원의 길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협곡을 건너 산을 넘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풍광에 압도되어 말을 잃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 한그루 없는 고원에는 갖가지 앉은뱅이 야생화만 피어있었다. 노란색과 보라색, 분홍색 꽃들이 서로 자리를 내어주며 아옹다옹 뒤섞여 있었다.

 

드디어 제일 높은 구릉에 도착한 우리는 지프에서 내려 끝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하얀 겨울과 녹색의 봄이 공존하는 계곡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도 바람을 따라서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걷고 싶었다. 그러나 높은 설산을 넘지 못하는 구름은 산허리에 걸려있고 언제든지 폭우로 변할 수 있기에 더 가고픈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낯선 길은 늘 가슴을 뛰게 만들고, 아직도 잠재우지 못한 호기심은 새로운 길을 찾아 기웃거리게 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출발하여 두어 시간 달리면 백양목 숲이 장관인 두르겐 계곡이 나오고 그곳에서 더 험한 길을 한참 올라야 해발 2800킬로미터쯤 되는 아씨고원이 나온다. 고원에는 해발이 높아서인지 나무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잘 가꾸어 놓은 잔디처럼 초록색 풀이 끝없이 넓은 벌판을 뒤덮고 있다.

 

 초록색 카펫에 간혹 노랑, 분홍, 보라색 무늬가 새겨진 것처럼 보이는 곳은 갖가지 야생화가 군락지를 이룬 곳이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기후 변화가 심해서 파랗던 하늘이 금방 검은 구름에 휩싸인다. 우리 일행들은 마음이 급해져서 그곳에 주저앉거나 엎드려서 야생화를 촬영하거나 눈앞에 보이는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저 멀리 협곡 아래로는 말떼가 간간히 보이고 등불처럼 유목민이 이동하며 거주하는 유루타도 보인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저 유루타가 있는 곳이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으려면 유목민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녹색 구릉 사이로 에스라인을 만들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돌아보면 내 인생길도 먼 길을 걸어왔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기쁘거나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쓰러지도록 힘들어서 삶이 노엽고 슬플 때도 많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걷다보니 어느새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 삶의 깊이를 하나씩 알아갔고, 나이가 들면 저절로 삶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고 지혜가 쌓이며 작은 가슴도 넓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집과 편협함이 쌓이고 나를 해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미움과 시기 그리고 섭섭한 감정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내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나를 자각하는 서글픔이고 아픈 고통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앞서 지나갔던 끝없이 펼쳐진 그 길을 바라보며 묵묵히 길을 걷는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그리고 그 길에서 내가 정말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인지 길에서 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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