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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19

사소한 일상이 귀하게 느껴질때 사소한 일상이 귀하게 느껴질 때                                                                                                                                                           한 향 순   며칠 동안 벼르다가 건물 맨 위층에 있는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는 빨래를 널 수 있는 거치대와 고장 난 가구와 집기들이 여기 저기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귀퉁이가 부서져서 앉을 수도 없는 의자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운동은커녕 걷는 것조차 여의치 않는 공간에 몇 개의 허름한 화분이 있었는데, 연 녹색으로 고물고물 고개를 내미는 상추와 고추 모종이.. 2024. 12. 12.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한 향 순   요양병원의 아침은 새벽 5시부터 몹시 소란하고 분주하다. 처음에는 이른 새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쿵 쿵”하는 소리의 정체를 몰라서 몹시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복용하는 약은 많은데 삼키는 기능이 약해진 어르신들의 약을 가루로 빻느라고 병실마다 부산스럽게 아침을 알리는 알람이 된 것이다. 불행과 사고는 늘 예고 없이 뒤통수를 치는 법. 올해 봄, 운전을 하다가 심하게 교통사고를 당해 대학병원에 가서 일주일쯤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긴 시간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 근처의 재활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척추 골절로 꼼짝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던 두 달 반 동안 요양병원의 하루는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통증은 물론 모든 것이 생소한 환경 속에서 몸을 움직.. 2024. 12. 12.
마음 다스리기 마음 다스리기   며칠 전, 딸애가 장난감같이 생긴 자그만 백자 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니?”라고 물었더니 친구가 사주었다며 멍 때리기 할 때 쓰는 물건이라고 했다. 아니 진짜 백자도 아니고 아이들 장난감 같이 생긴 물건이 멍 때리기에 유용한 물건이라니 얼른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한창 유행하던 말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하는 ‘불멍’이나 바다를 보며 멍하니 있는 ‘물멍’은 들어보았지만, 하얀 백자 모형을 보고 멍 때리기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고 외계인 취급을 받을 수는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궁금증이 생겼다. 올 봄에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구본창의 ‘항해’라는 전시를 보.. 2024. 9. 29.
당연한 일 당연한 일 한 향 순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연히 시선이 아래쪽으로 가다보니 운전대에 놓인 손이 허전했다. 약지에 항상 나의 분신처럼 끼워져 있던 반지가 안 보인다. 언제 어디서 빠져나갔는지 그동안 어떻게 잃어버린 것을 전혀 몰랐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봐도 그럴 일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갈 경우의 수를 아무리 상상해 봐도 다른 날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IMF를 극복하려고 금 모으기를 할 때도 그 반지만은 없애고 싶지 않아 남겨둔 것이었다. 하도 오래 끼다보니 손가락에 살은 빠지고 손가락 매듭은 굵어져서 반지를 끼고 빼기도 힘들어졌다. 오년 전쯤, ‘회전근개파열’이라는 병명으로 수술.. 2024. 3. 18.
겨울나무의 지혜 겨울나무의 지혜 한 향 순 올 겨울 날씨는 마치 널뛰기를 하는 것 같았다. 12월인데도 계절에 맞지 않게 따뜻한 날들이 지속되더니 갑자기 무서운 한파가 몰아치며 몸을 웅크리게 하였다. 친구들 모임에서 수목원을 찾은 날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였다. 숲속의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나목들이 겨울의 애상을 말해주는 듯 빈 가지를 벌리고 우리를 맞고 있었다. 봄이나 가을에는 사람들로 붐비던 수목원에도 겨울이 되어서인지 산책객들은 없고, 나무에 겨우살이를 준비해주느라 분주하게 일을 하는 관리자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그분들은 나무에 짚을 감기도 하고 가지치기를 해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도 옛날에는 월동준비를 하려고 겨우내 먹을 김장을 하고 땔감을 준비하기 위해 장작이나 연탄을 .. 2024. 3. 8.
마지막 여정 2023년 겨울호에 실린 글 마지막 여정 한 향 순 며칠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특별한 전시를 보게 되었다. 예매를 못했는데도 운 좋게 보게 된 것은 이란 제목의 전시였다. 전시품들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 발견된 토기와 토우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전시를 보다가 토기와 토우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빚어졌는지 감탄하며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토기는 가까운 이를 보내며 준비한 마지막 선물로 삶을 마무리하는 개인적인 공간에 넣은 것들이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보내는 이들의 삶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곳에는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다보니 친가와 시가 부모님들은 모두 돌.. 2023. 12. 29.
정성 가득한 선물 정성 가득한 선물 한 향 순 눈부시게 환한 꽃들이 피어나고 연녹색 이파리들이 꽃보다 더 예쁘게 고물거리는 봄도 지나고 벌써 여름이다. 아름다운 계절 4,5월을 올해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아주 심한 감기로 혹독하게 고생을 하다 보니 마치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3년 동안 코로나로 무장하던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마스크를 벗고 나니 마음이 해이해졌을까 사월 중순쯤 감기가 걸렸다. 처음에는 동네병원에서 약을 지어다 먹고 며칠 쉬다보면 낫겠지 싶어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낫기는커녕 증세가 점점 심해지며 기침까지 하게 되었다. 평소에 기관지가 약해 기침감기가 오래 가는 편이어서 그때부터는 겁이 나서 외출이나 운동도 자제하고 집에서 꼼짝 못하고 근신을 하였다. 며칠 치료를 하면 나으려니 싶던.. 2023. 7. 12.
추억의 길 위에서 2023년 봄 호 추억의 길 위에서 한 향 순 무심코 TV를 켜자 눈이 군데군데 쌓인 커다란 설산이 다가왔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봉우리 사이로 가늘게 이어진 길을 따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길은 산중턱을 가로지르며 마치 ‘차마고도’처럼 아슬아슬하게 절벽 끝으로 이어져있어 보는 사람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요일 내가 즐겨보는 영상앨범 ‘산’이라는 프로이다. 처음에는 이곳이 어디인줄도 모르고 그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따라갔다. 차츰 눈에 익은 지형들이 들어오고 상황설명을 하는 성우의 목소리로 그곳이 바로 미국과 캐나다 접경지역에 있는 ‘글레이셔국립공원’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글레이셔국립공원을 다녀온 것은 7년 전인 2016년 여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옐로우.. 2023. 4. 1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2023년 그린에세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한 향 순 지난 겨울은 길고도 추웠다. 유례없이 12월부터 한파가 시작되었고 가스 값이 폭등하여 어딜 가나 난방비 폭탄이 서민들의 주요 화제였다.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날,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갈 기회가 있어 평소에 관심이 많은 사진전시를 보았다. 박완서의 소설 제목과 같은 란 제목의 사진전시는 애잔한 그리움이 몰려오는 정겨운 풍경들이었다. 1948년 겨울,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누가 찍은 것인지 촬영자 미상의 사진들이지만 일부 사진에 미군정 관계자가 찍힌 것으로 보아 어느 미군장병이 서울 도심과 한강 등지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진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관되었다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1948년.. 2023. 4. 14.
친구를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한 향 순 40년 동안 가깝게 지내던 친구한테서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날벼락 같은 소식을 받았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주사를 맞고 있는 모습과 함께 “췌장암 악성”이라는 간단한 문자를 받은 것이다. 두 달 전만 해도 셋이 만나 밥을 먹고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지지 않았던가. 이달에는 몸이 안 좋으니 한 달 거르고 담달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사람 일이 한치 앞을 모른다고 하지만, 너무도 쾌활하고 열심히 살아온 친구였기에 그런 나쁜 병에 발목을 잡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째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제대로 못자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데, 그녀를 처음 만나던 때와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흑백필름처럼 떠올랐다. 사십여 년 전.. 2023. 3. 22.
자신을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자신을 잘 조절할 수 있다면 한 향 순 약속이 있어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데, 무엇인가 코 주위에 서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갖다 대니 영락없이 선홍색 피가 묻어났다. “에구 또 코피가 나네.” 얼른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닦은 후, 티슈를 돌돌 말아 코 안에 집어넣었다. 휴지는 금방 붉은 색으로 물들고 코피는 진정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코피가 나면 휴지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오 분정도 있으면 그치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쉽게 그치지 않고 애를 먹였다. ‘내가 어제 무리를 했나?’ 하고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다. 코로나로 그동안 만나지 못하던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 시내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서너 시간 수다를 .. 2023. 3. 22.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선 한 향 순 외국에 살고 있는 며느리와 작은 손자가 삼년 만에 집에 다니러왔다. 코로나로 막혔던 하늘길이 열리자 아이의 방학을 이용하여 아들과 큰 손자는 집에 두고, 모자(母子)가 큰 결행을 한 것이다. 우선 성장기에 있는 둘째 손자가 그동안 몰라보리만큼 커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게 사진도 보내고 영상통화도 가끔 했지만 실제로 보니 아이는 삼년 동안 사춘기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 의젓한 청소년이 되어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학입시 준비로 시간이 금쪽같은 아이를 데리고 어찌 여행을 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며느리와 손자는 내 조바심과는 달리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늘 만나면 하던 행사로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며칠간 여행을 하며 그간의 소식이며 밀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2022.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