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기
며칠 전, 딸애가 장난감같이 생긴 자그만 백자 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니?”라고 물었더니 친구가 사주었다며 멍 때리기 할 때 쓰는 물건이라고 했다.
아니 진짜 백자도 아니고 아이들 장난감 같이 생긴 물건이 멍 때리기에 유용한 물건이라니 얼른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한창 유행하던 말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하는 ‘불멍’이나 바다를 보며 멍하니 있는 ‘물멍’은 들어보았지만,
하얀 백자 모형을 보고 멍 때리기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고 외계인 취급을 받을 수는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궁금증이 생겼다.
올 봄에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구본창의 ‘항해’라는 전시를 보았다.
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이자 실험적 가능성을 개척해 온 구본창의 사진 인생이 모두 담긴 전시였다.
내성적이었던 청년이 현실의 벽을 깨고 이미지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거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사진들과 함께 펼쳐서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크고 화려한 것에 주목하는데 비해 작가는 드러나지 않고 고즈넉하게 숨어 있는 존재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왔다. 작고 조용한 사물에게 말을 걸고 귀를 기울여온 작가가 추구해 온 삶의 자세와 작품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통해 조용한 교감을 경험할 수 있었던 전시였다.
그 중에서도 오랫동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온 백자 시리즈는 너무 감동이었다.
조선 백자의 특징인 자연과 어우러지는 소박함과 우아한 백자를 촬영하였는데,
마치 흰색이 여백의 미처럼 기교 없는 백자의 본연의 품격을 모자라지도 넘치기도 않게 표현하였다.
백자의 거친 듯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을 간결하면서도 기품 있는 흑백의 이미지들로 만들어
더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조선 백자는 흰색의 순수한 결정체이다. 순결함을 상징하는 순백색처럼 조선 백자를 그저 하얗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잘 빚어 낸 막걸리의 빛깔 같기도 하고 혹은 따뜻한 봄날에 환하게 밝혀 주는 목련꽃 같기도 하다.
백자의 색감은 흙에서 좌우되기 때문에 조선의 장인들은 흙에 심혈을 기울였다.
흙에 철분이 많으면 흰빛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철분이 섞이지 않은 백토를 구하느라
멀리까지 가서 진땀을 뺐다고 한다.
잘 빚은 자기를 가마에 넣고 오랜 산고 끝에 탄생한 백자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있다.
조선 백자에는 빚어낸 사람의 정성과 손맛을 하나하나 간직한 인간적인 정이 넘쳐흐른다.
아무런 문양도 없고 단순하면서도 여유롭고 풍요로운 멋을 담은 순백의 달 항아리는
조선의 미적 감각을 그대로 표현한 대표적인 백자일 것이다.
우리 집에도 40여 년 전에 어떤 인연으로 오게 된 백자 달 항아리가 하나 있다.
그저 밋밋하고 아무 무늬도 없는 수수한 백자이지만 오랫동안 손때가 묻어서인지 퍽 정감이 가는 도자기였다.
옛날에는 유행처럼 어느 집에나 동양화 그림이나 도자기 한 ,두 점은 으레 있기 마련이어서
백자를 문갑 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흐뭇해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며 가구도 바뀌고 유행도 바뀌다보니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조차 잊고 있었다.
전시회에 다녀 온 날, 흉내라도 내보려고 카메라를 꺼내들고 백자를 찾으니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구석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천대를 받고 있었다.
그때서야 전시회에서 본 문구 “어떤 사물에게서 공명을 받고 오랫동안 교감이 되지 않으면 좋은 촬영을 할 수 없다.”
는 것을 생각하고 바로 촬영을 포기하고 말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팍팍한 사회에서 얼마나 감정이나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면
백자 모형의 작은 그릇을 보며 멍 때리기를 할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점점 감소하는 우리나라 출산율도 문제이지만 OECD국가 중에 세계 제 1위라는 자살률이 더 심각하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게임이나 쇼핑에 몰입해도 중독으로 마비시킨 슬픔은
언젠가 시한폭탄처럼 숨어 있다가 몸의 반란인 병으로 나타난다.
그런 고통에 참패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고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고맙다는 것을
자주 깨닫고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2024년 여름호 < 계간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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