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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139

겨울 연지에서 새해가 된지 벌써 이틀째이군요. 해가 바뀐다고 특별하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새해에는 좀 더 부지런하자고 새마음으로 다짐해봅니다. 친구님들도 올 한해 건강하시고 좋은 인연으로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겨울 연지에서 한 향 순 밤새 윙윙거리던 바람이 잦아들더니 연지에는 하얀 무서리가 내렸다. 벌집 같은 연밥은 알맹이 텅 비워내고 껍질만 남긴 채 하얀 서리 맞으며 밤새 울었을 것이다. 연꽃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화려하게 꽃을 피운 건 저 그릇에 연밥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햇볕과 바람과 빗방울로 뜸을 들인 연밥을 누구에게 내어주고 지금은 빈 몸으로 누었는가. 지금은 무서리 맞으며 외로움에 몸을 떨지만 한때 고결하고 우아한 자태로 환호를 받던 연꽃처럼 누구나 한 시절 푸르지 않았던 생이 있겠는가. .. 2024. 1. 2.
거센 파도가 있는 바다 거센 파도가 있는 바다 한 향 순 일출을 맞는 아침의 바다에는 인적도 없이 파도소리 만 거세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의 바다는 성이 잔뜩 나 있었다. 붉은 태양을 뒤로하고 거대한 바위섬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던 파도는 바위에 부딪쳐서 산산이 부서지고 까무러쳤다가는 시퍼런 가슴을 안고 다시 무서운 기세로 달려든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라고 읊었던 시인처럼 나도 그저 답답할 뿐이다. 몇 번의 거센 태풍이 더 지나야 성난 바다를 잠재울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저렇게 쓸쓸히 부서져 갈 파도처럼 누구나 속절없이 외로운 삶을 알고 있지 않은가. 쓰러지고 넘어졌다가도 파도처럼 달려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얻은 지혜는 속단하지도 말고 .. 2023. 8. 30.
산수국의 숙명 산수국의 숙명 한 향 순 비가 자주 내리는 유월의 숲속은 음습하고 축축하다 이맘 때, 삼나무가 울창한 제주의 사려니 숲속은 가끔 뽀얀 안개 속에 휩싸여 몽환적인 분위기가 된다. 그때 보석처럼 매달린 물방울들을 달고 바닷물 색으로 피어서 숙명처럼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꽃이 있다. 쭉쭉 뻗은 삼나무 아래로 파랗게 펼쳐진 산수국 군락지이다. 산수국은 작은 꽃들이 접시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데, 가장자리에 아름답게 핀 꽃과 중앙에 자잘하게 모여 있는 꽃은 모양도 기능도 서로 다르다 가장자리의 큰 꽃잎은 무성화인 헛꽃이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가짜로 피운 꽃잎이며 가운데 자잘한 꽃잎들이 진짜 꽃인 유성화이다. 작고 볼품없는 진짜 꽃의 주위를 빙 둘러서 피어있는 무성화는 유성화의 가루받이가 끝나면 꽃잎을 땅.. 2023. 6. 7.
스리미낙시 사원 남인도 스리 미낙시 사원 한 향 순 바이가이강 주변에 위치한 도시 마두라이는 유럽 식민지 역사를 거치지 않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고대 로마와 무역을 하며 경제를 키웠던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판드야 왕국의 수도였고, 16세기 중반에는 나야크 왕조의 수도로 성장해왔다. 이슬람 문화가 혼재된 북인도의 주요 도시나 영국 식민지 이후에 발달하게 된 첸나이와 달리, 마두라이는 인도 고유의 힌두 문화를 잘 지켜온 도시로 꼽힌다. 마두라이에는 북인도인보다는 검은 피부를 가진 주로 타밀족이 많다. 그들은 아직 문명의 이기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웃으며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면 거의 촬영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두라이 시내를 걷다보면 화려한 색감의 탑들을 볼 수 있는데.. 2023. 4. 14.
폐선 폐선 한 향 순 작은 포구에는 밀물이 시작되는지 갯벌은 점점 잠겨들고 수평선과 작은 섬 뒤로 불그레한 노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물이 들어오는 갯고랑에는 작은 물고기가 있는지 갈매기들이 가끔 그 위를 선회하고 있다. 갈매기가 앉은 곳에 얼른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작은 폐선이 시커먼 갯벌 속으로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한때는 주인이 애지중지하며 배를 길들였을 것이고, 파도와 싸우며 그들의 밥벌이를 책임졌을 작은 목선이다. 이제는 늙고 쇠락하여 주인에게 버려지고 아무런 항거도 못하고 갯벌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목선은 한창 왕성하게 일을 하던 시절의 자랑스러운 패기와 수많은 기억들을 함구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사람도 저 폐선처럼 늙고 병이 들면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 2023. 3. 22.
섬으로 가는 길 섬으로 가는 길 한 향 순 병균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고 기피하는 동안 섬은 길이 끊기고 바다 속에 외딴 섬이 되어갔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시처럼 고립되어 단절이 되었던 사람들도, 깊은 고독과 소외감으로 외로웠던 사람들도, 섬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고립의 시간들도 점점 잊혀지고 침묵하던 섬에 바닷길이 열리고 사람의 발길이 이어졌다. 덩달아 섬에도 수선스런 발자국과 고성이 난무했다. 그동안 참고 인내하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으려면 조심스런 행보가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2022년 12월호 2022. 11. 27.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 한 향 순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 오랜 친구의 제안으로 프랑스 여행길에 올랐다. 친구는 삼심여년 전에 만난 글벗으로 지금까지도 내 옆에 가까이 있는 고마운 사람이다. 더구나 목적지가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예술의 도시 프로방스지역이라고 하니 반 고흐의 흔적을 직접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마음이 설렜다. 프랑스의 로마로 불리는 아를은, 아비뇽과 함께 프로방스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도시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이자 프랑스의 대표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를의 여인〉에 등장한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고흐는 1년간 아를에 머물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길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해바라기〉〈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테라스〉 등의 대표작을 여기에.. 2022. 11. 27.
사막을 오르며 사막을 오르며 한 향 순 억겁의 세월동안 침식된 계곡은 물에 씻겨 모래를 만들고 바람은 그것을 실어 날랐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는 높은 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고 고독한 모래 언덕을 만들었다. 동트기 전, 분홍빛 여명이 모래언덕을 비출 때 우리는 사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발은 자꾸 모래 속에 빠지고 가까이 보이던 정상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황금을 찾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죽음의 계곡. 거친 자연 그대로의 모습처럼 황량하고 처절해서 더 아름다운 곳 데스밸리. 사막을 오르는 것은 힘든 오늘을 잘 사는 것과 같다. 우리 삶의 고비에는 몇 개의 사막이 더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2022년 9월호 2022. 9. 20.
불탑의 나라 미얀마 불탑의 나라 미얀마 한 향 순 불교문화의 오랜 전통을 온전하게 보존해 가고 있는 미얀마는 어디를 가든지 불탑을 볼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불탑이 수없이 많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부처의 미소가 환하게 피어 있다. 마치 먹고 숨을 쉬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불교는 종교를 넘어 그들의 삶 전체인 것 같았다. 우리는 미얀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역사의 도시 바간으로 향했다. 바간은 1057년 아노리타 왕이 버마를 통일할 당시 바간 왕조의 수도였으며, 그때의 영광이 지금까지 2,500여개의 파고다로 남아있다. 바간의 수많은 불탑들이 의미 있는 것은 포로와 노예들을 시켜 강제로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극진한 신앙심으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불심(佛心)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2022. 8. 10.
꽃사슴이 있는 섬 꽃사슴이 있는 섬 한 향 순 봄기운에 대지와 나무에 물이 오르고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계절이 되면 인천시 옹진군에 있는 굴업도를 떠올리게 된다. 굴업도는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리기도 하고 백패킹의 성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직도 때 묻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섬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불편하다. 당일로 다녀올 수는 없고 인천에서 덕적도에 가는 배를 타고 1시간 남짓 간 다음, 덕적도에서 굴업도행을 기다렸다가 다시 배를 갈아타고 한 시간 넘게 가야 목적지에 도착 할 수 있다. 굴업도에는 조그만 마을에 열 가구정도 살고 있는데 교통편이라야 마을 이장님이 운영하는 트럭이 고작이다. 미리 민박예약을 해야 마중을 나오시는데 트럭 짐칸에 짐과 사람을 함께 싣고 마을에 도착하면.. 2022. 5. 28.
삘기꽃 연가 삘기꽃 연가 한 향 순 화사한 봄꽃들이 지고 나면 가끔 삘기꽃을 만나러 갔었다. 이맘때면 광활한 들판을 솜털처럼 하얗게 뒤덮는 곳이 있다. 꽃이라기보다는 벼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삘기는 옛날 보릿고개를 넘을 때,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씹던 풀이다. 우음도(牛音島)는 원래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섬이었는데, 시화호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섬이 육지로 변한 곳이다. 그동안 이곳에는 공룡알 화석지도 생기고 전망대도 생겼지만 아직도 넓은 들판에는 나무들이 띄엄띄엄 서있고 억새와 삘기가 우거진 야생의 땅이기도 하다. 바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나무를 흔들고 고라니가 억새와 잡초를 마구 헤집어 놓고 다녀도 흔적이 남지 않는 외로운 땅.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장엄한 일출도 보고 삘기꽃 속에서 추억을 곱씹다보면 답답하던.. 2022. 5. 20.
해무에 갇히다 해무에 갇히다 한 향 순 희뿌연 해무가 섬을 삼켜버릴 듯 몰려오던 날 눈 빠지게 기다리던 배는 끝내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늠 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토끼섬 해식동굴을 찾았다. 검붉은 동굴은 거대한 생명체를 마주한 외계행성처럼 태고의 지구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파도와 염분 때문에 움푹 파인 동굴과 해식절벽이 터널처럼 길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앞을 가로 막는 해무 속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혼자다. 빠져 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듯 두려움이 몰려온다. 곁에 있는 인연을 모두 격리시키는 막강한 해무처럼 언제쯤 병균이 잦아들고 환한 햇빛이 들지 모르겠다. 그저 안개가 걷힐 때까지 꿋꿋하게 버틸 뿐이다. 2022년 2월호 2022.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