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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산수국의 숙명

by 아네모네(한향순) 2023. 6. 7.

 

산수국의 숙명

 

                                                                                                 한 향 순

비가 자주 내리는 유월의 숲속은 음습하고 축축하다

이맘 때, 삼나무가 울창한 제주의 사려니 숲속은

가끔 뽀얀 안개 속에 휩싸여 몽환적인 분위기가 된다.

그때 보석처럼 매달린 물방울들을 달고 바닷물 색으로 피어서

숙명처럼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꽃이 있다.

쭉쭉 뻗은 삼나무 아래로 파랗게 펼쳐진 산수국 군락지이다.

 

산수국은 작은 꽃들이 접시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데,

가장자리에 아름답게 핀 꽃과 중앙에 자잘하게

모여 있는 꽃은 모양도 기능도 서로 다르다

가장자리의 큰 꽃잎은 무성화인 헛꽃이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가짜로 피운 꽃잎이며

가운데 자잘한 꽃잎들이 진짜 꽃인 유성화이다.

 

작고 볼품없는 진짜 꽃의 주위를 빙 둘러서 피어있는 무성화는

유성화의 가루받이가 끝나면 꽃잎을 땅으로 향한다.

한 봉오리에 달려있는 진짜 꽃이 열매를 맺도록 하고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겨버리는 것이다.

헛꽃의 헌신은 대가없이 주는 모성애와 비슷하다.

그러기에 유월의 산수국은 더욱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2023년 6월호  < 좋은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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