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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139

겨울 산 겨울산은 어쩐지 쓸쓸하다. 여름내 풍성하던 나뭇잎도 벗고 물기가 걷힌 골짜기에는 낙엽이 쌓인 채 흰 눈이 깔려있다.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앙상한 나무들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올곧게 위로 뻗은 놈이나 용트림을 하며 옆으로 굽은 나무, 모두가 제각기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찬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며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가듯 살았던 시간들이 속절없게 느껴지고, 인간적인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의연하게 서 있는 산을 본다.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꿋꿋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산. 넓은 가슴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며 생명력까지 나누어주는 산처럼 감히 나도 그렇게 넉넉하게 늙어가고 싶다. 2022. 1. 21.
미로속의 도시 미로 속의 도시 한 향 순 스페인을 거의 둘러보고 페리를 타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모로코의 탕헤르 항으로 들어왔다. 탕헤르는 지중해 입구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한 모로코의 항구 도시인데, 유럽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로 들어갈 때 처음 만나게 되는 첫 도시이다.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 중 최단거리로 1시간 만에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건너왔지만 두 대륙은 너무나 많은 문화적, 경제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도 모로코의 어린 소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스페인을 오가는 버스 뒤꽁무니나 밑창에 매달려 유럽으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고 했다. 카사블랑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은 ‘핫산 메스키다’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이슬람사원으로 카사블랑카의 바다를 매립하여 지은.. 2022. 1. 6.
한파주의보 한파주의보 윤용기 꽁꽁 얼어붙은 대지 위로 뽀하얀 잔설이 수를 놓고 겨울 내내 영하 15도의 한파주의보 어제 쪼잘대던 버드나무 위 까치는 밤새 괜찮은지? 지금은 한파주의보 발령 중! 얼어붙은 대지와 움츠린 사람들의 얼굴에 따스한 햇살 비추는 그 날 들판에서 한파와 시름하는 들풀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시험하고 있다. 2021. 12. 25.
제주의 팽나무 제주의 팽나무 한 향 순 제주의 팽나무는 마디 굵은 늙은 어머니의 손을 닮았다. 울퉁불퉁 옹이가 생긴 가지에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나무가 안쓰러우면서도 신령스럽다. 제주 방언으로 폭낭이라 부르는 팽나무는 마을의 신목(神木)이자, 제주 정신의 상징이었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가지를 뻗은 팽나무를 가만히 보노라면 불굴의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팽나무는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허리가 구부러져서 숱한 고난의 역사를 참고 견디는 제주 사람들을 닮았다. 사계절의 팽나무 중에도 유독 잎이 모두 떨어지고 빈 가지를 보여주는 나목(裸木)의 팽나무를 좋아한다. 중산간 쪽으로 올라가면 쓸쓸한 언덕에 어떤 의식을 치르듯이 홀로 의연하게 서 있는 팽나무가 보인다. 한때 그곳은 마을이 있었던 자리이며 그 마을을 지켜주던 보.. 2021. 11. 30.
전설속에 묻힐 갈대의 섬 전설 속에 묻힐 갈대의 섬 한 향 순 스산한 바람 따라 어디든 가고 싶은 계절이다. 바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나무를 흔들고 갈대를 마구 헤집어 놓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 외로운 땅이 있다. 한국의 세렝게티라고 부르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수섬과 형도이다. 그곳에서 몇 해 동안 촬영을 하느라 장엄하게 이글거리는 일출도 만났었고 온몸을 태우며 스러져가는 일몰도 보던 곳이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늪지를 쏘다니다 보면 가끔은 고라니나 야생동물들도 만나고 발이 늪지에 빠지기도 하지만, 메마른 현대인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고마운 야생의 땅이기도 하다. 수섬과 형도는 시화호 간척사업으로 바다와 섬이 육지로 변한 넓은 들판에 들풀과 함초가 끝없이 펼쳐져있는 곳이다. 한때는.. 2021. 11. 13.
선홍색 그리움 꽃무릇 선홍색 그리움 꽃무릇 한 향 순 숨이 막히게 무덥고 기승을 부리던 여름도 계절 앞에서 무릎을 꿇고 9월이 되면 한껏 가을빛을 받아 붉은 빛을 토해내는 꽃이 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그리다가 제 몸 활활 태워 선홍빛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절집 근처에, 여인의 속눈썹 같은 붉은 꽃잎의 꽃무릇이 핀다. 가슴에 맺혔던 상처를 피멍으로 토해내듯 선홍색 강렬한 색채로 산자락을 물들이는 꽃, 어쩌다 절집 근처에 이토록 화려한 꽃의 군락지를 이루게 되었을까.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해 서로 애타게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로 부르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둘은 서로 다르다. 꽃무릇은 석산화라고도 부르며 9월쯤 꽃이 피었다 지고 나야 나중에 잎이 돋아나고 상사화는 봄에 줄기가 먼저 나오고 나서 늦여.. 2021. 9. 16.
살풀이 춤 살풀이 춤 한 향 순 해가 뜨기 전, 벌판은 희뿌연 안개 속에 갇혀 있다. 넓은 초지가 끝없이 이어진 야생의 벌판에서 슬픈 가락에 맞춰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하얀 한복을 입은 여인은 희고 긴 수건을 치켜들고 있다. 가락은 천천히 애조를 띠며 흐르다가 어느 순간 숨차게 고조를 이루더니 다시 흐느끼듯 느린 가락으로 이어진다. 여인의 맺고 푸는 춤사위가 계속되면서 하늘과 땅의 기(氣)를 모으고 있다. 느리지만 강인하게, 부드럽고 섬세하게 한 사위 한 사위 빚어가면서 한(恨)을 풀고 맺힌 살을 풀어 나쁜 기운의 사슬을 풀어나간다. 살풀이춤은 맺고 풀음을 통해 한을 승화시키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내적으로 강하게 표출하는 춤사위이다. 살풀이는 '살(煞)과, 맺힌 것 또는 얽매인 것을 풀어낸다는 뜻으로 우리민.. 2021. 8. 7.
잠베지 강의 일몰 잠베지 강의 일 몰 한 향 순 우리 집 거실에는 아프리카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강물과 맞닿은 하늘이 노을에 불타고 있는데,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에 노란 빛이 적당히 몸을 섞고 있다. 또한 데칼코마니처럼 강물에 비친 반영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한쪽에는 검은 피부의 원주민이 노를 쥐고 있는 작품이다. 이 사진은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 잠베지 강에서 찍은 것이다. 구리 빛 사공의 얼굴은 저녁 햇빛을 받아 강물과 같이 애잔한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게 된 것은 TV에서 즐겨보던 프로 ‘동물의 왕국’ 때문이기도 했다. 광활한 초원에서 야생의 동물들이 자연과 맞서거나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장면들을 보면서 인간의 세상살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고, 언젠가는 드넓은 초원에서 맘껏 뛰노는 야생동물들.. 2021. 8. 4.
비둘기낭 폭포 비둘기낭 폭포 한 향 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7월은 몸과 마음이 열기에 탈진이 된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날 선 감정에 지친 날이면 하루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찾아 떠나는 게 상책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바다보다는 깊은 산속 청량하게 쏟아지는 폭포와 시원한 계곡이 더 마음에 끌린다. 비둘기낭폭포는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대회산리 비둘기낭 마을에 있는 폭포이다. 폭포 뒤의 동굴에서 백 비둘기들이 집을 짓고 살았는데, 비둘기 둥지와 같이 움푹 파인 낭떠러지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유래하였다. 이 폭포는 포천 한탄강의 용암분출과 불무산에서 발원한 계곡이 형성한 폭포로 천연기념물 로 지정되었다. 목책으로 만든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자 거대한 현무암 협곡의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우묵하게 파.. 2021. 7. 29.
은총의 루르드 성지 은총의 루르드 한 향 순 프랑스 파리를 다시 찾은 것은 삼십 년 만이였다. 팔십 년대 중반 남편이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해외로 불러내어 같이 유럽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감회에 젖어 파리 시내를 돌아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도시는 많은 세월을 머리에 이고도 아무런 변화 없이 우리를 맞아주었지만 젊었던 우리는 어느새 초로의 노인들이 되어 오래 된 추억을 떠올렸다. 파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이튿날 아침에 툴루즈에 닿은 뒤, 다시 버스로 한참을 달려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에 도착했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 근처의 작은 마을인데, 로마 가톨릭 교황청에서 인정한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이다. 매년 6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성지순례를 오는데, 중환자나 장애인, 불.. 2021. 6. 20.
나의 살던 고향은 나의 살던 고향은 한 향 순 밤새 후드득 거리며 비가 내렸다. 단비는 마른 대지를 적시더니 앞 다투어 피어나던 개나리 진달래 벚꽃까지 모두 떨어뜨렸다. 다른 꽃들이 지고나면 그때야 느지막이 분홍색 꽃망울을 터트리는 동네가 있다. 아늑하고 부드러운 골짜기를 따라 옷고름 같이 좁은 길로 들어서면 꿈에서나 본 듯한 무릉도원이 펼쳐진다. 분홍빛 복사꽃이 흐드러진 동네는 아직 몽유의 세상이다. 그 길에는 어릴 적 보았던 키 큰 미루나무도 있고 유년시절 꿈에 그리던 아늑한 기와집도 있다. 충북 음성군 감곡에 가면 온 동네가 거의 복숭아밭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옛 연인을 만나러 가듯이 거르지 않고 찾게 되는 곳이다. 어느 동네에 가면 복사꽃 반영이 아름답게 비치는 저수지도 있고, 어떤 마을에 가면 아름드리 노목이 된.. 2021. 5. 19.
초록의 향연 초록의 향연 한 향 순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봄꽃들이 하나 둘 꽃잎을 떨구고 너무나 짧은 꽃의 산화에 허망함을 느낄 때쯤, 꽃과 이별한 자리에서 연둣빛 잎사귀가 고물고물 나온다. 온 천지가 녹색의 계절이 오면 어느 곳인들 천국이 아닐까마는, 계단식 밭에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차밭으로 달려간다. 겨우내 추위를 이겨낸 자리에서 돋는 연녹색 새순들 여린 잎을 일일이 손으로 따서 모은 찻잎을 넓은 솥에 넣고 쉼 없이 뒤집어가며 말리고 손으로 찻잎을 돌돌 말듯 비비는 유념을 거쳐 열기와 손맛, 시간과 공이 찻잎에 스며든다. 아홉 번의 힘든 과정을 거쳐야 깊은 맛의 생차가 되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서서히 익어가겠지. 이른 아침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는 차밭을 멍하니 걷다가 따뜻한 차를 천천히 마시면 무겁던 머리.. 2021.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