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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선홍색 그리움 꽃무릇

by 아네모네(한향순) 2021. 9. 16.

 

선홍색 그리움 꽃무릇

 

                                                                                                            한 향 순

 

숨이 막히게 무덥고 기승을 부리던 여름도 계절 앞에서 무릎을 꿇고 9월이 되면

한껏 가을빛을 받아 붉은 빛을 토해내는 꽃이 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그리다가 제 몸 활활 태워 선홍빛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절집 근처에,

여인의 속눈썹 같은 붉은 꽃잎의 꽃무릇이 핀다.

가슴에 맺혔던 상처를 피멍으로 토해내듯 선홍색 강렬한 색채로 산자락을 물들이는 꽃,

어쩌다 절집 근처에 이토록 화려한 꽃의 군락지를 이루게 되었을까.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해 서로 애타게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로 부르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둘은 서로 다르다.

 

 

꽃무릇은 석산화라고도 부르며 9월쯤 꽃이 피었다 지고 나야 나중에 잎이 돋아나고

상사화는 봄에 줄기가 먼저 나오고 나서 늦여름에 분홍색 꽃이 핀다.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한 곳은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등 여러 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곳은 도솔천 물길과 어우러져 한층 더 운치가 있는 선운사이다.

가을에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대부분 오래된 절이다.

이유는 꽃무릇 뿌리에 있는 독성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사찰 단청이나 불화에

좀이나 벌레가 꼬이는 걸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절에서 많이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이것에서 추출한 녹말로 불경을 제본하고 탱화를 만들 때도 썼다고 전해진다.

 

 

이른 새벽, 어둠을 뚫고 달려가 선운사에 도착하면 막 빛이 들기 시작한 붉은 벌판에는

황홀한 여러 가지 색채가 뒤섞여있다. 연녹색 연약한 꽃대와 선홍빛 꽃이 어우러져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밤새 머금은 이슬방울들이 여인의 속눈썹 같은 긴 꽃술위로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선운사 노목들 옆에서 강렬한 붉은 빛을 토해내는 꽃들은 마치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황홀하고 도솔천에 드리운 꽃의 반영은 고혹적인 여인의 자태를 닮았다.

내 생애 언제 한번이라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불타오른 적이 있었던가.

선홍빛 그리움을 가슴 한편에 묻고 세월에 비켜간 고운 인연들을 떠올려 본다.

 

 

 

 

 

                                                     2021년 9,10 월호 <그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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