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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나의 살던 고향은

by 아네모네(한향순) 2021. 5. 19.

 

나의 살던 고향은

                                                                                                                         한 향 순

 

밤새 후드득 거리며 비가 내렸다. 단비는 마른 대지를 적시더니 앞 다투어 피어나던

개나리 진달래 벚꽃까지 모두 떨어뜨렸다.

다른 꽃들이 지고나면 그때야 느지막이 분홍색 꽃망울을 터트리는 동네가 있다.

아늑하고 부드러운 골짜기를 따라 옷고름 같이 좁은 길로 들어서면 꿈에서나 본 듯한 무릉도원이 펼쳐진다.

분홍빛 복사꽃이 흐드러진 동네는 아직 몽유의 세상이다.

그 길에는 어릴 적 보았던 키 큰 미루나무도 있고 유년시절 꿈에 그리던 아늑한 기와집도 있다.

 

 

충북 음성군 감곡에 가면 온 동네가 거의 복숭아밭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옛 연인을 만나러 가듯이 거르지 않고 찾게 되는 곳이다.

어느 동네에 가면 복사꽃 반영이 아름답게 비치는 저수지도 있고,

어떤 마을에 가면 아름드리 노목이 된 복숭아나무도 만나게 된다.

거친 세월을 이고 몸은 굽었어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과수원 옆에는 잘 가꾸어진 무덤이 많다. 무덤가에는 어김없이 보스스한 털을

가득 뒤집어 쓴 할미꽃들이 마중을 나온다.

수줍은 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 예쁜 꽃을 왜 할미꽃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하기는 할머니들도 솜털이 보스스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게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묵은 앨범을 정리하다가

어머니의 낡은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복사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봄날, 동네 분들과 꽃놀이라도 가셨는지

젊은 어머니는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었다.

그런데 호방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거리낌 없는 환한 웃음을 웃으시며 포즈를 취하셨다.

나는 생전에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어느 봄날 한잔 술과 꽃향기에 잔뜩 취하셨나보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다가올 것 같은 봄날, 옛길을 걸어 세월 저편에 가 닿고 싶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진 고향 동네에 돌아가서 그리운 옛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때는 못했던 말들을 다정하게 나누고 싶다. 정말로 사랑했으며 많이 그립고 보고 싶다고....

꽃들은 못된 병균과 상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산골동네에도 하루하루가

낡은 소식처럼 쌓여가지만 바람은 옛일을 기억하는 듯 싱그럽기만 하다.

흐드러진 봄 날 복숭아꽃 만개한 산골마을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고 깊은 위로를 얻는 날이다..

 

 

                                                        2021년 5,6월호<그린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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