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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

마지막 여정

by 아네모네(한향순) 2023. 12. 29.

 

                                                           2023년 < 계간수필> 겨울호에 실린 글

 

마지막 여정

 

                                                                                                                                                    한 향 순

 

며칠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특별한 전시를 보게 되었다.

예매를 못했는데도 운 좋게 보게 된 것은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이란 제목의 전시였다.

전시품들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 발견된 토기와 토우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전시를 보다가 토기와 토우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빚어졌는지

감탄하며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토기는 가까운 이를 보내며 준비한 마지막 선물로 삶을 마무리하는 개인적인 공간에 넣은 것들이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보내는 이들의 삶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곳에는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다보니 친가와 시가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근래에는 몇 안 되는

동기간들의 죽음까지 보게 되었다. 애통하게도 몇 년 전에 남동생과 제부를 잃었고

작년에는 손아래 시동생을 떠나보냈다.

올해는 건강하시던 손위 아주버님이 갑자기 이승을 떠나셨다.

남의 일처럼 잊고 있던 죽음은 늘 우리 곁에 도사리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더구나 올 봄에 40년 동안 가까이 지내던 친구를 갑자기 잃고 나서는 한동안 마음이 심란하여

오랫동안 우울함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구나 태어나면 가야하는 길 마지막 여정이지만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예측 할 수 없는

죽음에 놀라고 당황하며 슬픔을 삭이지 못한다. 또한 떠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에 그저 망연히 상실의 아픔을 후회와 자책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목격한 죽음은 나를 끔찍하게 아끼셨던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갑작스런 부음을 받고 황망히 집으로 달려오니 놀랍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가 며칠 병석에 누워계셨지만

그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에 가족 모두가 혼란스러움 속에 넋이 빠져있었다.

맏손녀인 내가 처음 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값비싼 손목시계를 사주시며 흐뭇해하시던 할머니,

하교 길에 시장에 들르면 얼른 달려오셔서 간식거리를 사주시던 집안의 기둥 같은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외아들인 아버지를 낳고 곧 혼자가 되셨는데 고향인 강화도를 떠나 인천으로 오셔서

억척스럽게 장사를 하여 아들을 키우고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때는 강화도까지 다리가 없어 오로지 교통수단은 인천에서 배를 타는 것뿐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 날, 시신을 선산인 강화도로 모시기 위해 조그만 목선을 빌려 섬으로 가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험악하여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배가 기우뚱거리며 위험에 처하였다.

그렇다고 다시 뱃머리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모두 멀미를 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으며

서너 시간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강화도에 닿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상여를 꾸미고 상여꾼들이 할머니가 예전에 사시던 집에 들려 작별을 고하며

가시는 분에게 노자 돈을 드리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돈을 쓰실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망자가 가시는 길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라고 아버지와 친척들은 돌아가며 노자 돈을 듬뿍 놓아드렸다.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는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사후의 세계로 가는 장송의례이다.

그러나 1600년 전, 고대의 장송의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진다는

계세사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거대한 무덤에 많은 토기를 넣고 장례를 치르는 후장풍습도 이런 풍습에서 생겼다.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는 실제 모습을 본 뜬 여러 모양의 상형토기들이 묻혀있었는데,

새나 말, 수레나 등잔 등 상서로운 물건들을 축소해서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

또한 죽은 이의 다음 삶을 위한 상징적인 토기도 넣었는데 바로 제의용 그릇이다.

또한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고 떠나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동행이 될 수 있도록 상형 토기도 무덤에 넣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삶과 연속된 세상으로 바라보던 1,600년 전 사람들의 내세관이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무덤에는 아주 작고 정교하게 만든 토우들이 있었는데,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토우장식 토기에는 죽은 이의 영혼을 잘 보내고 사후세계에서도 현재와 같은 삶을 살 길 바라는 부활의 상징들이었다.

삶과 죽음이 단절 되지 않고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을 축제 같은 의례를 통해 승화시키려고 했다.

실제로 신라의 황남동 토우장식 토기에도 절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축제 같은 의례와 행렬 모습이 섬세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보내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이 함께했던 순간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바로 헤어짐의 축제를 연 것이다.

요즘이야 장례의식도 많이 간소화 되었고 시신을 매장하던 풍습도 점점 사라져 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과 애통함은 옛날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구나 태어나면 겪게 되는 삶의 마지막 여정을 어떻게 잘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요즘 내가 자주 생각하는 고민의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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