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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by 아네모네(한향순) 2023. 4. 14.

2023년 <3,4월호>그린에세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한 향 순

 

지난 겨울은 길고도 추웠다. 유례없이 12월부터 한파가 시작되었고 가스 값이 폭등하여

어딜 가나 난방비 폭탄이 서민들의 주요 화제였다.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날,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갈 기회가 있어 평소에 관심이 많은 사진전시를 보았다.

박완서의 소설 제목과 같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란 제목의 사진전시는

애잔한 그리움이 몰려오는 정겨운 풍경들이었다. 1948년 겨울,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누가 찍은 것인지 촬영자 미상의 사진들이지만 일부 사진에 미군정 관계자가 찍힌 것으로 보아

어느 미군장병이 서울 도심과 한강 등지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진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관되었다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1948년이면 내가 태어나던 해이니 75 년 전 사진들인데, 사람들은 일상복으로 주로 한복을 입고 있었고,

더구나 아이들 모습은 모두 해맑았다, 색동의 한복을 설빔으로 입은 아이들이 더 아름다운 것은,

그 때 사진들은 흑백으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혹한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한강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과 낚시를 하는 강태공의 일상에서

그나마 희망의 불씨가 느껴진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몇 달 되지 않아 우리나라는 결국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만, 혼란스런 시기였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속의 사진들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삶의 희망과 여유를 갖게 하는

잔잔한 여운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때는 한반도에 소련군과 미군이 주둔해있어 민족분단의 서막이 서서히 오르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사람들은 나라를 잃었어도 기개를 버리지 않았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았으며 혹한 속에서도

그 어떤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사진은 전하고 있다.

그 해 태어난 우리는 그때의 기억은 전혀 없고 추웠던 겨울을 떠올리면 화곡동 시절이 생각난다.

내가 결혼을 하고 처음 서울 화곡동 산동네에 지은 주택은 당시로는 모던한 지붕이 뾰족한 프랑스식 주택이었다.

언덕위에 있어 바람도 많이 맞고 지붕이 높기에 외풍도 심했다.

그래도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에 두어 달 물을 길어다 먹으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남편의 직장에서 야산에 대지를 공동구매하여 집을 지었기에 한동네 사람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나이에 고만고만한 아이들까지 사는 것이 비슷하였다.

난방은 처음에는 방마다 연탄을 직접 때서 방을 덥히다가 몇 년 후에는 물을 덥혀 순환을 시키는

연탄보일러 방식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날마다 이 방 저 방으로 뛰어다니며 연탄을 갈아 넣기에 바빴다.

더구나 거실에는 소파를 들여놓고 커다란 연탄난로까지 설치했으니

겨울이면 그야말로 연탄을 갈아 넣기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나마 남편이 있을 때는 연탄불 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몇 년 동안 해외지사에 나가 있을 때는

나 혼자 아이들 건사하랴 연탄불 갈아 넣느라 밤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다.

어쩌다가 때를 놓쳐 연탄불을 꺼트리다보면 밤새 온수 탱크는 꽁꽁 얼어서 터지기도 하고

그 물들이 부엌으로 흘러내려 지하실로 스며들었다.

가을이 되면 제일먼저 월동 준비를 하는 것이 겨우내 쓸 연탄을 들여 놓는 것인데

지하실에 빼곡하게 쌓여있는 연탄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런데 지하실로 스며든 물이 연탄을 뭉개고 나란히 쌓아놓은 연탄을 탄광처럼 만들어서 울음을 터트리게도 했다.

더구나 다 타버린 연탄재를 갖다 버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대문 옆 담벼락에 연탄재를 쌓아놓으면 청소부 아저씨들이 가져가곤 했는데 짓궂은 아이들이

연탄재를 발로 차거나 싸움질이라도 하는 날이면 부서진 연탄재를 치우느라 전전긍긍하였다.

그래도 그 겨울이 따뜻하게만 기억되는 것은 함께 웃고 울던 이웃들이 있어서이다.

남편들이 같은 직장에 있다 보니 골목 안에 누구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모두 고만고만하니 서로 가까워 질수 밖에 없었다.

어느 집에서 맛있는 음식냄새가 나면 담 너머로 서로 나누어 먹고, 누구네 손님들이 온다고 하면

교자상이나 그릇을 서로 빌려 쓰는 골목 안 인정이 있었다.

그곳에서 13년을 사는 동안 아이들은 이웃 사랑으로 많이 컸고 매일 얼굴을 보던 주부들은 동네친구가 되었다.

그 동네에서는 사는 형편도 모두 비슷하여 굳이 있는 체를 하거나 어렵다고 엄살을 부리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점차 세월이 흐르며 골목안 사람들도 모두 이사를 가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때의 따뜻했던 인정을 못 잊어하며 화곡동 친구들은 40년째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우리도 많이 늙고 그때의 아이들도 모두 커서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어엿한 중년들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굴곡진 삶을 살아오며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화곡동 시절에 다져진 삶의 내공과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리고 포근한 인정으로 그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 친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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