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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

친구를 위하여

by 아네모네(한향순) 2023. 3. 22.

 

 

친구를 위하여

 

                                                                                                                                                          한 향 순

 

40년 동안 가깝게 지내던 친구한테서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날벼락 같은 소식을 받았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주사를 맞고 있는 모습과 함께 췌장암 악성이라는 간단한 문자를 받은 것이다.

두 달 전만 해도 셋이 만나 밥을 먹고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지지 않았던가.

이달에는 몸이 안 좋으니 한 달 거르고 담달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사람 일이 한치 앞을 모른다고 하지만, 너무도 쾌활하고 열심히 살아온 친구였기에

그런 나쁜 병에 발목을 잡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째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제대로 못자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데,

그녀를 처음 만나던 때와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흑백필름처럼 떠올랐다.

사십여 년 전쯤, 여성동아에서 공모하는 논픽션에 당선되어 나의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때 경남 창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잡지에서 우연히 내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 남편의 직장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내 연락처를 알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한끝에 전화 연결이 되어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살고 있는 동네도 우리 집과 삼십 여분 거리에 있었고, 친구의 아들과 우리 아들은

같은 초등학교 같은 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 후, 그녀는 틈만 나면 우리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객지에서의 외로움도 컸겠지만, 비슷한 나이에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공감대가 많아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많이 달랐다.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 서구적인 외모와 쾌활하고 재치 있는 달변의 친구는

평범한 가정주부인 나하고는 전혀 딴판이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 편이었고, 친구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하다가

아이들이 하교를 할 때쯤이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친밀함이 몇 년 동안 지속되다 보니 남편이나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여행도 같이 다니고

집안끼리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고 우리도 세월 따라 늙어가며 만남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친구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서 사는 이야기도 나누며

사십년 동안 희노애락의 삶의 고비를 같이 해왔던 친구였다.

그녀가 어떤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고, 끊임없는 봉사생활을 통해서 동분서주 하던 모습을 보아왔기에

그녀의 와병소식은 더 허탈했고 기가 막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걱정과 고민을 들어주는 심리상담사 역할을 삼십여 년이 넘게 해왔다.

지역사회에서 주로 청소년 상담과 가정상담을 했으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도 끊임없이 해오던 터이다. 그러나 정작 자기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해결을 못하고

허물없이 지내 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곤 했다.

다른 사람을 상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할 것이다.

이해와 공감이란 무엇일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잠시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공감 받지 못하고 외롭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의 위로가 될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감정소모도 크고 마음의 폭이 넓지 않으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따라 친구가 보내 온 이해인 수녀님의 친구를 위하여라는 시가 절절하게 가슴에 맺힌다.

 

올 한해도 /친구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잘 있지? 별일 없지? / 평범하지만 진심어린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 그의 웃음과 눈물 속에

늘 함께 있음을 고마워합니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보다 깊은 신뢰로

침묵 속에 잘 익어/ 감칠맛 나는 향기

그의 우정은 기도입니다. / 그의 목소리는 음악입니다.

친구의 건강을 지켜주십시오/ 친구의 가족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어느덧 올 한해도 저물어가고 속절없는 세월은 또 덧없이 흘러가겠지만

모진 병마와 사투를 하고 있는 친구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친구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녀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2023년 봄호 <에세이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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