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그때 그시절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9. 13.

그때 그 시절

 

 

  추억의 골목길을 지나 좁은 계단을 오르자 오래전에 보았던 산동네가 나타났다. 연탄과 등유를 파는 가게와 공중변소가 보이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 집들이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좁은 방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식구가 기거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방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개켜 있었다. 마치 내가 소인국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행동반경이 좁은 만큼 가족들의 체취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으니, 지금보다는 오히려 가족애가 더 정겨웠는지 모른다.

 

  오늘은 친구와 얼마 전부터 벼르던 “아! 어머니”전을 보기위해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은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우리를 단박에 순수한 어린 시절로 안내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사오십 년 전, 우리가 공유하던 추억의 물건이며 구조물들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처음 들어선 구멍가게에는 옛날 가게풍경은 물론 어릴 적에 먹던 왕사탕과 엿까지 그대로 팔고 있었다.

 

  정말 기억 속에 가물거리던 가재도구까지 세심하게 놓여 있었다. 해방과 전쟁을 치르고 가난에 허덕이던 그 시절, 사람들은 너남 없이 가난을 벗어나고자 치열하게 살았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잘 먹이기 위해 험한 일도 마다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사셨던 시기일 것이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더욱 눈물겹고 정겨운 기억으로 점철되는 것 같다.

 

  해방을 맞은 몇 해후, 인천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도시의 번화가에서 제화(製靴)점을 하고 계셨고, 생활력이 강한 할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맏손녀인 나에게는 늘 후하셨다. 그 시절에도 나는 란도셀을 메고 구두를 신었으며, 중학교 입학선물로 할머니에게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다. 내 밑으로 남동생이 둘이나 생겼어도 나는 운이 좋게 여전히 집안의 맏이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안의 기둥 같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자 졸지에 가세가 어려워졌다. 급기야 오래 살던 우리의 이층집은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우리 식구는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해야 했다. 더구나 여장부 같은 할머니의 외아들로 고생모르고 살아오신 아버지의 실망과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아버지는 지인들이 많은 인천에서의 파산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행을 결심하셨는데, 그렇다고 서울에서 누가 오라고 반기는 사람도 없는 일종의 도피였다.

 

  학교를 다니던 남동생 둘은 여고생인 나에게 맡기고 부모님은 막내만 데리고 서울로 떠나셨기에 나는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되어버렸다. 극진한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내가 살림을 도맡아하며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때는 그나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시절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곧 다가올 희망이 나를 지탱해주었는데, 그것은 서울로 돈 벌러 가신 아버지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다녀가시는 부모님에게서는 좋은 소식은커녕 한숨소리와 시름만 늘어가는 듯 싶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우리들을 불러올리겠다는 약속은 차츰 길어지고 일 년 만에 가본 서울은 결코 꿈에 그리던 곳이 아니었다. 전차가 다니고 백화점이 있고 네온사인이 휘황한 서울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 할 수가 없었다. 그곳은 오늘 내가 본, 그 산동네와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바로 그런 생활이 처참한 부모님의 현실이었다.

 

  결국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두 동생과 함께 지내던 겨울은 혹독한 추위와 함께 삶에 대한 회의마저도 빛바랜 감상처럼 느껴졌다. 방안의 물도 쩍쩍 얼어붙는 추위에 연탄불은 꺼지고 동생들은 굶길 수 없어 숯을 피워 불씨를 살려서 밥을 했다. 곧 오신다던 부모님은 안 오시고 하루하루가 조바심 나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건강하고 젊다는 패기와 오기로 집을 나서면 아슬아슬하게 올라 탄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 전쟁 같은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그때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가난이 왜 그리도 싫고 창피했을까.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는 길만이 인생 최대의 목표처럼 생각되곤 했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절의 고난이 있어 내가 부쩍 성숙하고 일찍 철이 들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삶에 지쳐서 힘들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힘을 얻곤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만이 인생을 논(論)할 수 있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고생을 모르고 양지에서만 자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만이 그런 고생을 한건 아니고 그 시절에는 대개의 사람들이 겪은 일일 텐데도 오직 서럽고 가슴 아픈 연민으로만 기억되는 시절이다.

 

  낡은 극장포스터와 잡지 표지들이 덮여있는 50여 년 전의 골목길을 뒤로하고 나오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풍요롭고 편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정말 정신적으로도 풍요롭고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결코 물질적인 척도와 가치가 행복의 필요한 조건은 될지언정 잣대는 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나의 글모음 > 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다니는 갈대섬  (0) 2009.09.13
잃어버린 공중도시  (0) 2009.09.13
누군가를 위해서  (0) 2009.09.06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0) 2009.09.06
씨뿌리는 사람  (0) 2009.09.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