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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9. 6.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며칠 전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행기를 오래 탄 일이 있다. 지루한 시간을 대비하여 읽을 책도 꾸렸고 TV나 음악을 듣기 위해 이어폰도 챙겼다. 그러나 그날따라 날씨가 나빠서인지 기체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요동을 쳤다. 기장(機長)의 양해를 구하는 안내 방송을 들어서 미리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느닷없이 비행기가 낙하하는가 하면 기체의 흔들림이 워낙 심해서 이러다 혹시 잘못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더럭 겁이 났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낯선 동네에서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추락한 경험이 있었다. 그 건물은 신도시에 주차시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건물이었는데, 그 지하에는 목욕탕 시설이 있었다. 무심코 3층에다 차를 주차 시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이 닫히면서 조금 내려가는가 싶더니 덜커덩 소리가 나며 느닷없이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아래로 곤두박질 쳐졌다. 그러면서 정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어떤 상황인지 전혀 짐작이 안 되고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둠속에서 내 몸을 더듬어보니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때부터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이 넘도록 폐쇄된 공간속에서 불안감에 떨어야했다. 사람의 왕래가 뜸한 곳이기도 했지만 비상벨도 작동되지 않아 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해도 외부와의 연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런 상황에 휴대폰도 없었고 도움을 청할 방법이 전혀 없어 정말 무섭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절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이 한 시간쯤 후에 가까스로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알게 되어 용케도 구출되는 일을 겪었지만 그동안 어둠속에서 별별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런 다급한 상황이 되면 우선 누구든 크게 당황하게 되고 “만약에 내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부딪히게 되나 보다.

 

  나도 그랬다. 잠시 동안이지만 이러다가 엘리베이터가 다시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위험한 상태에서 극한 상황까지 상상하다보니 우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의 준비 없는 이별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마음이 착잡해졌다.그러자 이런저런 아쉬운 생각과 함께 눈물이 나며 그동안 그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후회가 크게 밀려왔다.

 

  평상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사소한 잘못도 후회가 되었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자잘한 일들에도 마음이 쓰였다. 또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하잘 것 없는 것에도 인색하기만 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타고난 성격은 변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그곳에서 무사히 돌아온 나는 그런 생각들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지난여름 끝자락 즈음, 우연히 어느 단체에서 주관하는 <부부 세미나>에 일박 이일로 참가했었다. 결혼한 지 35년이나 되어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는 세월이 지났는데 쑥스럽고 멋쩍게 무슨 수련회일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더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라는 광고 문구에 현혹되어 참가 신청을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부간의 사랑의 표현방법이라든지 속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해 갈등을 겪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런 것을 가르쳐준다니 귀가 솔깃했다.

 

  그 모임에는 30쌍의 부부들이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쑥스러워서 모두 쭈뼛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허심탄회하게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처럼의 감동과 뿌듯한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유익한 특강과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서로의 자아 상태를 알아보는 마음 그림표 작성을 통해 상대방과 나의 다른 점을 찾아 갈등을 해소하고 대화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특히 부부간의 ‘사랑의 편지’쓰기와 상대방의 발을 정성을 다하여 씻겨주는 ‘세족(洗足)식’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유서 쓰기’시간이 있었다.

 

 

  다분히 가상(假想)으로 만든 형식적인 시간이었지만 마지막 마음을 글로 남기는 일은 비장하고도 진지했다. 사람이란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글이 정말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유서쓰기에 몰입하자 여러 가지 생각들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을 막상 글로 써놓고 보니 희한하게도 엘리베이터 사고가 났을 때 했던 생각들과 많이 일치하였다.

 

  옛말에 “새가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는 말이 있다. 정말 곧 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것에 집착할 일도 욕심을 부릴 일도 없을 터인데, 사람은 앞일을 모르기에 사소한 일에도 아등바등하는지 모르겠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 않았던가. 정말 누구와도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200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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