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서
올 여름은 유난히 비가 잦았다.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우리나라도 아열대성 기후로 변하는 징후라고 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한 여름뿐 아니라 9월로 접어들면서도 맑고 쾌청한 하늘보다는 시커먼 구름을 몰고 오는 반갑지 않은 가을비가 오랫동안 찔끔거렸다. 한창 벼가 익고 과실도 여물게 해야 할 때 햇볕이 부족하니 농사도 걱정이고 채소 값도 만만치 않을 거라고 주부들의 걱정이 컸다.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절기는 제 순서를 알고 찾아온다. 오늘도 집 뒤에 있는 산을 쉬엄쉬엄 오르자니 마지막 항거를 하듯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고 벌써 결실을 준비하는 나뭇잎들은 수액을 거두고 부스스한 얼굴을 보여준다. 평일이어선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별로 없이 한산하여 산중턱에 휴식 터로 꾸며놓은 정자에도 앉아보고 느긋함을 즐겨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휴식 터 주변에 예쁜 꽃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리 꽃 이라던가 봉숭아꽃 같은 것이 조금씩 심어져 있었는데, 차츰 꽃의 가지 수도 많아지고 작은 돌들로 경계를 만들어 놓아 제법 예쁜 화단이 되었다. 그러더니 나팔꽃 같은 넝쿨 식물도 심어 놓고 일일이 타고 올라갈 지지대와 끈을 연결해 놓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런데다 꽃을 심을까하고 무심하게 지나쳤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꽃밭이 누군가의 정성으로 빛이 나고 아름다워졌다. 그러다보니 무심히 산을 오르던 사람들도 꽃밭에 눈길을 주고 나날이 달라지는 꽃들의 자태에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하기는 높은 산 위에 꽃을 가져다 심는 것도 문제려니와 죽어가는 꽃을 보살피고 물을 주는 일은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 얼핏 보니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이 꽃을 심더라는 이야기도 들렸고, 새벽에 산에 올라오는 조기회 회원들이 한일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누군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즐거웠다면 그 즐거움을 여러 사람과 나누기 위해 산위에 꽃을 심고 정성껏 가꾸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파트 옆 도로변도 아닌 높은 산중턱 척박한 땅에 꽃을 심기 위해서는 자갈이나 돌도 골라내야 되고 얼마나 많은 땀과 정성이 필요했을지 짐작이 된다. 그런 보이지 않는 수고와 정성이 있었기에 여러 사람이 잠시나마 꽃을 보고 행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8년 전, 낯선 이동네로 이사 와서 처음 이 산에 오를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마음이었다. 평탄하고 안락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깊이도 알 수 없는 암흑 같은 벼랑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우리 부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분노와 허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매일 산에 올랐고 또한 겸허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제 거의 평안을 되찾고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요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누군가의 가호가 있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고 무사히 시련의 강을 건너온 느낌이 든다. 지나고 보면 그 정도의 시련이야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좌절이었는데도 왜 그때는 나 혼자 만이 치르는 홍역처럼 그렇게도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반쯤은 혼이 나간채로 휘적휘적 산에 오르는데 누군가 예쁜 종이에 시어(詩語)를 적어 소나무 군데군데 매달아 놓은 글귀들이 있었다. 그중에 누구의 시인지는 몰라도 “희망을 안고 산에 오릅니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것을 읽는 동안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희망>이라는 단어도 생소할 만큼 오랜만이었지만 '나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을까?'생각하며 지푸라기만한 가벼운 것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아니 내 글을 읽고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갖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값진 일일까 생각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도 많이 평정이 되었고 뜻하지 않게 주변상황도 좋아졌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하루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았듯이 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 꽃밭을 가꾸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면 좋은 시라도 베껴서 사람들이 오르는 숲속 길목에 매달아 놓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07, 9
'나의 글모음 > 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잃어버린 공중도시 (0) | 2009.09.13 |
---|---|
그때 그시절 (0) | 2009.09.13 |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0) | 2009.09.06 |
씨뿌리는 사람 (0) | 2009.09.06 |
그녀의 작품 (0) | 2009.08.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