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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잃어버린 공중도시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9. 13.

 

잃어버린 공중도시

 

 

  그 여인에겐 하루해가 짧기만 했다.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밭에 옥수수나 감자 농사도 지어야 했고, 징징거리며 보채는 아이에게 물을 길어다가 양식을 장만해 주어야 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며 해가 뜨고 기우는 동안 태양신을 향해 그렇게 간곡하게 빌었지만, 오늘도 남편은 소식이 없다. 그녀의 검은 얼굴은 눈물로 얼룩지고 커다란 눈망울은 두려움과 슬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깊은 산중이라 해가 일찍 지고 어둠이 음흉하게 깔리면 행여나 에스파냐 인들이 쳐들어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마저 해칠까봐 깊은 잠도 이루지 못하고 남편 생각을 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아이의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쌕쌕거리며 숨이 차오는 것이 괴질이 아닌가싶어 안절부절 이다.

 

  뾰족하게 치솟은 산이 양쪽에 버팀목처럼 서있고 가운데 말안장 모양을 한 분지의 마을에 여인은 살고 있었다. 지금, 오백년 전에 그녀가 살았던 마을 고샅길을 천천히 걸으며 알파카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가파른 계단식 밭을 바라보니 어쩐지 가슴이 서늘해져왔다. 같이 간 일행들은 기막힌 경치를 보며 숨이 막힌다고도 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뜬금없이 아주 오래전에 영화에서 보았던 그녀를 생각하며 세월의 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은 바로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곳이며, 보고 싶어 하던 곳인가. 그런데 막상 이곳에 오자 그녀가 생각나고 느닷없이 슬픔이 차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관광 스케줄 때문이었지만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 비행기를 열 번이나 갈아타고 거기서 또 기차로 4시간, 그리고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꼬불꼬불한 산비탈을 열세굽이나 넘어 힘들게 찾아왔다.

 

  예일 대학 교수 하이럼 빙험(Hiram Bingham)은 1911년 7월 24일, 인디오 소년의 안내를 받아 400년 넘게 잡초에 덮여 있던 폐허를 발견한다. 원주민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알려 졌던 곳이라 발견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으나 그로 인하여 세계 유산이자 페루의 대표적 유적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114km 떨어진 우루밤바 강을 따라 내려간 지점에서 400m를 올라간 산 위에 있으며 해발 2,280m에 있는 면적 5평방km의 잉카 유적지이다.

 

  <잉카제국의 최후의 도시>나 <전설의 도시>라고도 하고 하늘에서만 볼 수 있다 하여 <잃어버린 공중도시>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4가지의 불가사의를 가지고 있다. “누가, 언제, 왜, 이 도시를 이 높은 곳에 어떻게 건설했고, 언제 왜 갑자기 사라 졌는가?”라는 의문점이다. 바로 500년 전에 불과한 이 유적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물건들로 보아 1438년부터 1531년 사이의 잉카제국의 도시였던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그러나 번성했던 잉카인들이 스페인의 침략을 받아 도망치다가 남은 인디오들이 이 산기슭에 최후의 요새를 만들고 숨어 있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더구나 이곳은 산위의 분지이므로 적에게 노출될 우려도 없고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어 그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마추픽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가 몇m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는데, 종이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붙어 있다. 젖은 모래에 비벼서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았다고 하는데, 연장하나 없던 그 시대에 이렇게 정교한 기술로 쌓은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마을 중심부인 서쪽에는 신전이나 궁전들이 배치되어 있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은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가파른 산비탈에 삼천 여개의 계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갖추어 옥수수나 감자 등을 심어 식량을 자급자족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추픽추에서는 몇 가지 수수께끼를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관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앳된 여성들의 미라가 땅에 묻혀 있지 않고 발견되었다. 그리고 마추픽추의 도시 인구는 약 1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남성의 미라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남자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에 나가 모두 죽어 버린 것이 아닐까 라는 설과 잉카인들이 최후에 모두 멸망한 것은 괴질 같은 전염병에 의한 죽음이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흔히 엽서의 그림이나 선전용으로 나오는 마추픽추의 사진은 멀리 보이는 뾰족하고 웅장한 산 밑의 마을 모습인데, 그 뾰족한 산은 <와이나 픽추>인데 젊은 봉우리라는 뜻이며, 마을이 있던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와이나 픽추에도 계단식 밭과 요새가 있어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어 아쉽게도 발길을 돌렸다.

 

  어쩌다 지구의 반대편을 돌아 이곳까지 와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내게 지도나 기념품을 파는 원주민여인이 졸졸 따라온다.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강한 햇볕과 고생으로 바싹 늙어 얼굴이 주름투성이다. 머리에는 차양이 적은 민속풍의 모자를 쓰고 프릴달린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폭넓은 치마를 입은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나라도 더 물건을 팔아서 먹을 것을 장만하려고 부지런히 관광객을 쫓아다니기 때문이다.

 

  원주민인 그녀의 모습위에 영화에서 본 슬픈 눈망울의 인디오 여인의 모습을 오버랩 시키며 우리는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늙은 봉우리를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200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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