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품
오늘은 두 여사님들과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먼저 도착한 박여사가 “이것 제 작품인데요.”라고 수줍게 말하며 두툼한 상자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들긴 했지만, 그 경황에 작품이라니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아 궁금하기만 했다. 상자의 겉모습만 보고는 전혀 무엇인지 예측 할 수가 없었는데, 결국은 식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꾸러미를 풀어보았다.
예쁜 포장지를 풀고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여인네의 속살처럼 하얀색 은행알들이 소복이 들어있었다. “아니 이게 웬 은행이지요?”라며 나도 모르게 반문을 하였더니, 그녀는 “그런 일이라도 바쁘게 해야지 멍하니 견딜 수가 없어서요.”라고 힘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던 지난 가을 어느 날, 너무도 황당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평소에 건강하시던 이사장님이 돌아가셔서 영안실에 계시다는 것이었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그동안 고약한 병을 앓고 계셨던 것도 아니고,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부부와 같이 유쾌하게 식사를 했었기에 처음에는 얼른 믿어지지가 않았다.
영안실에 도착해서야 안 사실은 그동안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발전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호전이 되어 퇴원을 하였는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반쯤은 넋이 나간채로 말하는 부인 박여사를 바라보며 어떤 위로의 말도 섣불리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하며 실감나지 않는 별리(別離)를 슬퍼할 뿐이었다.
한 이십 여 년 전쯤이었다. 테니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갔던 남편이 같은 아파트에 살고 계시던 한사장님과 이사장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이닥쳤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던 남편은 운동 후에 목이나 축이자며 두 분을 모시고 온 것이다. 그 후, 삭막하고 메마른 아파트 생활에서 세 사람은 모처럼 마음이 맞는 지기들이 되어 각별하게 친해졌고 더불어 부인들까지 합류하여 오손 도손 정을 나누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패기가 넘치던 40대에 만난 우리는 십여 년 후 각자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였지만 꾸준히 만나오면서 우의를 다져왔다.
그러던 사년 전쯤, 바쁘게 국내외를 드나들며 왕성하게 일을 하던 한사장님이 갑자기 고약한 병을 얻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 나가서까지 최선의 치료를 받았건만,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삼년 전에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의 충격과 슬픔은 지금도 가슴 한켠이 아리게 저려온다.
더구나 그는 무서운 병마와 싸우면서도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물론 여러 친지들에게 주옥같은 글들을 남기고 갔다. 그저 개인적인 글이라고 지나쳐 읽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글들이어서 지인들이 유고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은 책이 지금도 내 책상위에 꽂혀있다.
한사장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우리가 만날 때는 미망인인 최여사를 불러내어 예전처럼 아이들 소식도 묻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며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이사장님마저 떠나시고 나니, 세 부부 중에 오로지 우리부부만 남은 꼴이 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와서 우리는 새삼 삶의 허망함을 곱씹으며 식사를 하였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지난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면서 우리가 함께 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어딘지 허탈하게 웃는 두 분의 표정에는 외로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삼십년이 넘게 동고동락(同苦同樂)하던 가족이었고, 사랑하는 반려자를 잃은 절망감을 어찌 쉽게 이겨낼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슬픔의 와중에도 우리부부를 피하지 않고 만나 주는 것이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몇 년 전에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본적이 있다. 한 중년의 여인이 황량한 사막에서 목적지도 없는 길을 걷다가 지쳐서 어느 모텔에 찾아든다. 그 모텔의 카페에는 삶의 권태와 허름한 일상에 울고 있던 한 여인이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게 살고 있었는데, 두 여인의 공통점은 기다릴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외모나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외로움에 지쳐있던 두 여인은 차츰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사람의 깊은 심금을 울리는 듯 했던 <calling you >라는 그 영화의 주제곡도 좋았고, 피로와 권태에 찌든 지리멸렬한 일상에서도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기다리는 것은 결국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 굽이굽이 자락에도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복병이 숨어있다.
어느 때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 헤어 나올 길 없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고 전혀 빛이 보일 것 같지 않는 어둠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이기도 한다. 더구나 평생을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보호자가 되어 줄 것 같았던 반려자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은 겪어본 자가 아니면 그 나락의 깊이를 잘 모를 것이다.
박여사는 세 그루나 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털어내고 냄새가 고약한 열매를 주워서 일일이 발로 짓이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몇 번이고 물에 말갛게 행군 후에 뽀얀 은행 알을 수확한 것은 정말 절망감을 이기기 위한 힘겨운 투쟁이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표현처럼 그 은행 알들은 정말 슬픔과 외로움을 잘 정제하여 만든 훌륭한 작품인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진정으로 두 분이 험난한 인생의 고비 길에서 좌절하지 않고, 누추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바그다드 카페>의 주인공들처럼 씩씩하게 다시 웃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20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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