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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화해의 손을 내밀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30.

화해의 손을 내밀며

 

  K형! 폭염주위보로 땀을 흘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팔에 감기는 바람의 감촉이 가을의 문턱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곧 짙푸르던 나뭇잎들은 수액을 거두고 결실을 위해 시들어 갈 것이고 풀벌레들은 마지막 항거를 하듯 목이 아프도록 울어 대겠지요.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나면, 가을이 주는 쓸쓸함과 조금은 허망한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어느새 또 한해를 마무리하는 세모(歲暮)에 다다르게 되겠지요.

 

  우리의 젊은 시절에도 이렇게 세월의 흐름이 빨랐던가요? 그때는 무엇이 그리 분주했던지 매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에 치어 동동거리면서도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버린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 했었지요. 항상 의욕만 앞섰기 때문에 무엇에건 전력으로 매진하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만 그득했으니까요.

 

  K형!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이제야 안부를 챙깁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안부를 궁금해 하던 우리가 작은 일로 서운해서 소원해져 있던 시간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원래 상처란 친밀함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우리가 가까웠던 만큼 나에게 섭섭함도 많았을 것이고 배신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나 역시도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내가 보아오던 당신이 아닌 낯선 모습을 보고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화부터 냈으니까요.

 

  그동안 내가 아는 모습이 당신의 허상(虛像)인지 실상(實像)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한말 “친구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그런 점을 망각하고 당신에게 주제 넘는 충고를 하곤 했나 봅니다. 진정으로 미안합니다. 그러나 내 좁은 소견으로는 그대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서였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런 말이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처를 입힐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요.

 

  우리가 격조했던 시간동안 나의 친구로서가 아닌 당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거리가 필요했고 그런 채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우리도 젊은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나이가 들어 인생의 경륜이 깊어지고 세상 경험이 쌓이다보면 인생의 계급장처럼 저절로 마음의 폭도 넓어지고 이해의 깊이도 커지리라고요. 그런데 정작 나이가 들고 보니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더군요.

 

  자신을 뒤돌아보니 어느새 아집(我執)은 깊어지고 작은 일에도 서운해지는 옹졸함이 자신을 옥죄고 있더군요. 그것이 인생의 주역에서 밀려나 늙어간다는 초조감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결여되어 생기는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나 혼자 느끼는 점은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K형! 친구란 싫든 좋든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共存)하는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활방식이나 생각이 많이 달라도 그것을 좁혀가면서 공유할 수 있는 합일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성격이 너무나 다른 우리가 오랫동안 우정을 지켜 올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갖지 못한 것에는 상실감을 크게 느끼나 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기보다는 내 감정에 이끌려 자신을 옹호하게 되지요. 나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해했듯이 자신감에 차서 말로 횡포를 부렸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내 감정을 거르지 못하고 솔직하게 표현했을 뿐이니까요.

 

  K형! 이제 섭섭했던 지난일은 모두 잊읍시다. 자신을 변명하려 들자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상대방의 허물도 드러나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너무 친밀하게 느꼈기에 서로에게 소홀할 수도 있었을 테고 따라서 서운함도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좋았던 추억만을 떠올리며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에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며칠 전에는 가까이 지내던 지인 한분이 갑자기 폐렴으로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멍한 상태로 조문을 하고 왔습니다. 전혀 실감이 안 난다며 어리둥절해 있는 그 부인도 그랬지만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우리 앞에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그저 후회와 아쉬움만 남게 마련인가 봅니다.

 

  K형!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했던 아름답던 날들. 계절마다 바뀌는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며 위안을 삼으려했던 젊은 날의 갈망. 나름대로 시련을 겪으며 서로를 부축해주던 따뜻한 위로의 말들. 그런 소중한 추억들을 섭섭함 속에 묻어 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K형! 이제 당신께 진정으로 사과하며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여러 가지 시련과 노년의 외로움을 그대가 있고 내가 있어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것만으로도 든든하고 값진 일이 아닐 런지요.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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