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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꽃은 피어 웃고 있고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9. 13.

 

 

 

 

꽃은 피어 웃고 있고

 

 

  무대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다. 그녀는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붉은 진달래 꽃다발을 앞에 놓고 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윽고 천천히 팔을 들더니 자신의 마음을 몸짓과 얼굴 표정으로 표현한다. 꿈결인 듯 멀리서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온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자장자장 예쁜 애기 잘도 잔다.” 얼마나 애타게 보고 싶던 어머니의 목소리인가. 꿈속에서나마 한번이라도 가보고 싶은 고향과 가족들이 아니던가.

 

  애잔하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며 무엇인가를 호소하듯 가슴을 두드린다. 드디어 여인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간혹 두려움에 몸을 떨기도 한다. 그러다가 폭풍우 같은 분노가 그녀를 휩싸면서 가슴에 품고 있던 진달래 꽃다발을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뿌린다. 마침내 여인은 처참하게 찢긴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가까운 곳에서 <꽃은 피어 웃고 있고>라는 춤극을 공연한다는데 마침 시간이 나기에 별다른 기대 없이 혼자서 관람을 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며 극에 몰입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전율이 왔다. 그리고 무용수의 처절한 몸짓을 보며 마치 내 심장도 찢기듯 아파왔다. 무용극이긴 하지만 ‘아무런 대사도 없이 어떻게 감정전달이 될까.’ 라며 의구심을 품었던 내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몸짓과 표정으로 전달되는 그들의 감정에 온전히 동화되어서인지 오히려 무언(無言)의 감동이 더 컸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골목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열 너덧 살의 소녀들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에게 머리채를 잡혀 트럭에 태워진다. 얼굴도 낯설고 말도 안 통하는 일본군에게 끌려 다시 배에 태워지고, 어디론가 끌려간 소녀들에게는 악몽 같은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일본군들은 그녀들을 유린하고 난도질한다. 구타와 학대는 물론,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없는 짐승이 되기를 강요한다.

 

  모멸감과 치욕감 속에서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는 소녀들의 처절한 모습이 펼쳐지고, 고통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엄마!”를 불러보지만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 올뿐이다. 가슴에 피멍이 들고 심장이 찢기는 듯 아픈 소녀들의 몸짓을 보며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무대가 바뀌자 애달픈 진도 아리랑 가락이 흐르며 그래도 체념해 버린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소녀들의 몸짓이 구슬프게 이어진다. 그렇게나 엄마가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워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치욕적인 삶. 쓰러질듯 꼬꾸라지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몸짓이 구슬픈 아리랑 가락을 타고 이어진다. 오로지 죽고만 싶었어도 삶을 포기하지 못한 건 돌덩이처럼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恨) 때문이었을까.

 

  그네들이 꿈속에서나마 그리던 것은 연꽃과 모란꽃으로 화사하게 수를 놓고 빨강 파랑 끝동이 달린 예쁜 신부 옷을 입어 보는 것이었다. 이루지 못할 꿈을 평생 동안 가슴에 담고 살아온 여인들은 이제 늙고 병들어 어느새 죽음 앞에 와 있다. 결코 살아서는 입을 수 없던 그 꿈을 안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멍울진 가슴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이윽고 그들의 한 맺힌 삶을 풀어주기 위한 살풀이춤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렇게도 가기 싫어하던 길이었지만 여인은 드디어 죽음을 맞는다. 상여소리가 나며 여러 사람이 무덤의 봉분을 다지며 부르는 회다지 소리와 신 소리꾼의 독무가 이어지며 죽음의 축제가 열린다. 그 장례 행렬 중에 이승을 떠난 저승에서인지 그녀는 홀연히 꿈에 그리던 예쁜 신부 옷을 차려입고 훤칠하게 잘생긴 신랑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 혼례식을 치른다.

 

  에필로그는 신부가 다시 흰색의 혼례복을 입고 나타난다. 모든 것은 바람처럼 허망하고 또 허망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인가. 그녀는 흰색 혼례복을 갈기갈기 찢으며 결연하게 다시 일어나고 우리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의 상징이 서서히 무너져 간다.

 

  배우들의 인사가 끝나고 무대가 닫혀도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끔 역사를 통해서나 매스컴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이 불쌍하게도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막연한 동정심만 들뿐이었다. 그렇게 관심도 없던 역사속의 여인들이 어느덧 내 가슴을 파고들어 마구 헤집어 놓은 것이다.

 

  정말 내 어머니나 내 동기간의 이야기처럼 가슴이 아프고 쓰라렸다.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불길처럼 타 올랐다. 그들은 아직도 전쟁의 죄업(罪業)을 사죄하고 용서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수많은 전쟁의 희생자를 양산하고도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망언으로 그녀들의 원한을 부축이고 있다.

 

  극장을 걸어 나오며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도 아프게도 하고, 미처 모르던 것을 일깨워주며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예술의 힘일 것이다. 춤극을 보고 나와 같이 평범한 주부도 끓어오르는 역사의식과 어떤 소명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오늘의 공연은 큰 감동과 더불어 나의 가슴 한쪽에 잠자고 있던 따뜻한 마음을 일깨워주었다.

 

 

                                                                                                  20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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