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모래 속에서 사금(砂金)을 찾다.
한 향 순
살다보면 가끔은 익숙지 못한 시간 속에서 당황할 때가 더러 있다. 그날도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의 공백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루 종일 관광지를 돌아본다기에 간식과 음료수만 챙겼을 뿐, 배낭에 책 한권 넣어오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
오랫동안 햇볕바라기를 하며 졸고 있는 닭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주위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들꽃과 적요(寂寥) 속에서 고운 목청으로 지저귀는 새소리도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호주에 사는 아들네 집에 다니러 가는 길에 멜버른에 잠시 들렸다. 그것은 비싼 비행기 삯을 물고 가는데 이왕이면 다른 도시에 들려 구경이라도 하고 가자는 나의 얕은 머리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그래도 흔쾌히 동조해준 남편과 함께 낯선 도시에 내리니 과연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어 겁부터 났다.
이제는 어느 나라를 가나 한국인을 만날 수 있고 젊은이들은 지구촌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세상이지만, 모든 것이 서툰 60대 부부에게는 마치 미개척지 같았다.
이틀 동안은 지도를 들고 도시 구석구석을 뒤지며 박물관이나 미술관등 볼거리를 찾아 발이 붓도록 돌아다녔다. 그리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관광지는 사흘 동안 현지 관광회사를 통해 돌아보기로 했다. 첫날은 신비한 자연의 걸작 품이라고 칭하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라는 300킬로의 해안도로를 달리며 환상적인 절경에 감동을 받았다.
관광 둘째 날은 우거진 관목들에 둘려 쌓여진 새들의 천국 ‘단데농 파크’에서 아주 오래된 증기기관차를 타고 과거 속으로 추억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은 1850년대에 골드러시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소버린 힐’을 관광하기로 한 것이다. 소버린 힐(Sovereign Hill)은 호주의 민속촌 같은 곳으로, 금광 채굴지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금을 제련하던 마을을 복원해 놓은 곳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19세기 풍경이 펼쳐진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폭이 넓은 흙길 양옆으로 목재건물들이 도열해있으며, 대장간과 우체국, 사진관, 양초공장 등이 그 당시의 모습대로 나란히 서있다. 우리는 맨 처음 금광에서 채굴을 하여 금을 만드는 과정 등을 돌아보고, 이어서 대장간이나 양초공장 등 여러 곳을 관람하였다.
그곳에는 옛날 복장을 한 사람들이 그 시대의 생활상을 재현하고 있었다. 길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물속에서 무언가를 건지고 있었다. 채광지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의 모래를 대야에 퍼서 이리저리 흔들었는데, 사금이 모래보다 무겁기 때문에 가장 밑바닥에 남는다고 한다. 우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흉내를 내보았지만 금은 쉽게 눈에 띠지 않았다.
결국 사금 채취를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건너온 중국인들이 묵었던 천막촌을 천천히 둘러보았는데도 돌아갈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호주 인들이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자랑하는 역사적인 곳이라지만,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눈에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었다. 더구나 그곳은 관광객을 위한 배려도 적었고, 쉴만한 곳도 마땅치가 않아서 종일을 소일하며 관람할만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조금 실망을 하고 맞은편에 있던 황금 박물관이나 둘러보기로 하고 성급하게 ‘소버린 힐’을 나와 버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황금 박물관도 별로여서 꼼꼼히 돌아보았는데도 관람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관광지로 들어갈 수도 없는 우리는 남은 시간을 버스에서 쉬기로 하고 버스 문을 두드리니 부스스한 얼굴의 기사가 자기도 휴식을 취해야하니 지정된 시간에 오라는 것이었다. 약속된 시간은 아직도 두어 시간이나 남았는데 정말 난감하였다. 관광을 하다보면 항상 시간이 모자라서 동동걸음을 치곤했는데 오늘은 오히려 시간이 남아 걱정이다. 그렇다고 낯선 곳에서 마땅히 쉴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더욱 낭패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빨리 빨리’라는 문화에 젖어 늘 조급했던 것 같다. 더구나 통찰과 느낌이 중요한 여행 중에도 하나라도 더 보려는 조바심으로 동동거리며 거리를 헤매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그 나라의 문화나 핵심을 보는 시각을 놓친 것은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에는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처럼 시간의 활용에 의해 인생의 성패가 달렸다고 믿었기에 시간을 아끼려고 늘 급급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의 제약에서도 풀려난 노부부가 아직도 조급증 속에서 살고 있으니 그저 한심할 뿐이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느림의 미학’을 외치거나 ‘슬로우 라이프(Slow life)’운동도 벌어진다고 한다. 이제 노년의 우리 앞에 찾아올 많은 시간들을 잘 보내기 위해서라도 느긋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러나 아직은 빠르게 흩어지는 시간의 모래 속에서 사금(砂金)을 찾는 일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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