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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바람이 지나온 길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10. 25.

 

 

 

바람이 지나온 길

한 향 순

 

  오늘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오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친구를 만나듯 가슴을 설레며 행사장에 도착하니 벌써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안내 멘트가 백일장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여러 가지 축하 이벤트가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가족이나 친구끼리 아예 도시락을 싸가지고 소풍을 나온듯한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이십년 전, 처음 <전국주부 백일장> 참가를 위하여 아무도 몰래 가슴을 콩닥거리며 마로니에 공원을 찾던 날이 떠올랐다. 행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쩔까 싶어 몰래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끙끙거리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생각나고, 원고지를 내고는 누가 붙잡기라도 하듯 발표도 기다리지 않고 황망히 집에 돌아왔던 기억도 새롭다.

 

  오늘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참가인원도 많아졌고 상금도 무척이나 커져있었다. 더구나 예전에는 백일장이 여자들의 전유물 비슷했는데, 오늘은 학생부는 물론 일반부도 남자 응모자들이 꽤나 많았다. 상기된 얼굴로 접수신청을 하고 참가 용지를 받아서 들고 가는 그들의 진지한 뒷모습을 보며, 내가 오래 전에 두근거리며 지나온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며칠 전, 내가 살고 있는 O시에서 "시민 백일장"을 여는데 심사를 봐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사실은 그날 틈을 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십 년 전에 겪었던 두근거림과 행복한 긴장감을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맛보고 싶어 결국은 승낙을 하였다. 오래 전, 사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성실한 남편과 남매를 둔 지극히 평범한 주부였는데,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에 안달을 하며 자신을 들볶았다. 그것이 세상이나 사람과의 소통이었는지, 아니면 일상에 함몰된 자아를 찾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만의 목소리를 갖고 싶었다.

 

  오랫동안 고심을 한 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글로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싶어 수필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글공부를 시작한지 일 년 쯤 후에 처음으로 백일장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5월 어느 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여 원고지를 받아 들었다. 학창시절 이후로 처음 시험을 보는 것 같이 긴장감에 떨며 문제(文題)를 받아보니 <바람>이었다. 하도 막막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녹색의 마로니에 물결사이로 참가자들이 모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가슴은 바람처럼 들끓고 회오리치는데 시간이 꽤 흐르도록 멍하니 있다가, 마감시간이 촉박해서야 원고지를 내고는 누가 붙잡기라도 하듯 황망이 집으로 와버렸다. 그것은 초라하고 설익은 내 실력을 스스로 낱낱이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진행위원으로부터 내 글이 산문부문 차석인 입선이라는 소식을 받고는 한참동안이나 어리둥절해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일은 내가 지금까지 수필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고, 나도 노력을 하다보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오늘 심사위원은 모두 8명으로 가슴에 명패를 달고 아무도 모르게 따로 마련해 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우선 시와 산문 부문으로 나뉘어서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점수를 어떤 방식으로 매길 것인가 의논을 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접수 된 글을 읽으며 여유도 부렸으나 마감시간이 다가오고 한꺼번에 많은 글들이 몰리자 나중에는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더구나 참가자들이 백일장 결과를 보고 귀가하도록 하려니 더욱 시간이 빠듯했다.

 

  학생부의 문제는 <꿈>과 <꼴찌>이고 일반부는 <물>과 <거울>이었는데, 응모된 작품은 600여 편은 되는 것 같았다. 학생부의 심사를 보면서 느낀 점은 요즘은 논술교육 효과인지 모두 표현력이나 글을 이끌어 가는 힘이 좋았다. 그러나 마치 문제집의 정답을 베껴놓듯 비슷한 소재와 일반적인 정의로 글을 끌어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자기의 시각으로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듯이 자연스럽게 써내려가기보다는 마치 선생님께 듣거나 참고서에서 보고 베낀 듯한 비슷한 글들이 많았다.

 

  일반부도 자신의 체험이나 구체적인 생각보다는 누구나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쓴 글이 많아서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가끔은 가슴이 멍해지도록 아프고 진지한 삶의 이야기들로 읽는 재미와 감동을 주기도 했다. 또한 좋은 글은 무엇보다 진솔함이 배어있어야 하며 그래야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마감시간에 맞추느라 점심시간까지 줄이며 정신없이 심사를 끝내고 허리를 펴니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고 빠질 듯이 아파왔다.

 

  그래도 머리는 한줄기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시원해졌다. 여러 사람의 글을 읽으며 글을 쓸 때 피해야 할 것과 조심해야 할 점, 그리고 보완해야 할 것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필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을 접목시키는 작업이므로 자칫 자아도취에 빠지기 쉬우며, 바른 인격을 갖추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실감했다.

 

  이십여 년 전, 백일장에 참가하며 가슴을 들뜨게 한 회오리바람이 내 마음에 지나온 길을 만들듯이 오늘 여기 모인 사람에게도 그 바람이 널리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삶과 수필을 사랑하고 문학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으면 좋겠다.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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