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 솔은
언제부터인가 잘생긴 나무를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젊을 때는 길을 가다가도 용모가 수려한 사람이나 멋쟁이 여인들이 주로 눈에 띠었는데 요즘은 사람보다는 예쁜 들꽃이나 나무들을 관심 있게 보게 된다.
늠름한 몸체에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티나무나, 가을이면 온통 황금색으로 물드는 화려한 은행나무도 좋아하지만, 언제나 푸른 자태로 꿋꿋하게 서있는 잘생긴 소나무를 보면 더욱 마음이 끌린다. 우리나라 산림중의 40프로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나무의 주원산지는 어디인지 몰라도 옛날부터 우리의 삶 속에 늘 함께 있어 왔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기에 우리 겨레의 나무처럼 생각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며 솔가지로 불을 지폈고, 소나무껍질에서 송화 까지 먹을거리를 얻기도 했다. 더구나 죽어서는 소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가 솔숲에 둘러싸인 산에 묻히니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나무의 신세를 진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우리 민족은 어떤 나무보다 고결한 기상과 웅장한 기품이 있는 소나무를 많이 좋아했는데, 겨울이 와도 의연한 자태를 바꾸지 않는 꿋꿋한 소나무의 모습에서 옳은 일을 위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나무중의 소나무가 으뜸이라는 백목지장(白木之長)이라는 말과 함께 소나무에 관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의연한 선비정신을 갈고 닦았다.
산에 갔다가 우연히 잘생긴 소나무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나무는 주로 금강산 지역에 많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진 금강송이다. 곧게 뻗은 줄기는 적색에 가까워서 적송이라고도 불리는데, 경북 춘양지역에서 자란 금강송은 춘양목이라고도 하며 아주 단단하여 주로 목재로 쓰인다. 금강송 중에 백두산 지역에 많은 미인송(美人松)은 황색이 나는 황장목으로 역시 궁궐이나 절을 짓는데 많이 쓰인다고 한다.
오래전에 가본 강원도 삼척 지역에는 수령이 높은 미인송이 많은데 특히 이성계의 조상 묘인 <준경묘>에 가면 쭉쭉 뻗은 미인송 군락지의 장관(壯觀)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불에 탄 숭례문을 복원하기 위하여 그곳의 100살이 넘은 미인송 목재가 간택되었다고 한다. 대관령 자락에도 금강송들이 많은데, 우리가 여름철마다 찾던 대관령 휴양림 안에도 멋진 소나무들이 많았다. 무리한 산행으로 피곤이 누적되어 있다가도 소나무 숲속을 거닐다보면 어느새 머리도 개운해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소나무는 금강송 외에도 옆으로 퍼진 반송(盤松)이나 처진 소나무 등이 있는데, 예천에 있는 석송령은 자기의 토지까지 소유하고 있으며 재산세까지 내는 나무이다. 지난 해 친구와 힘겹게 찾아간 늠름하고 우아한 자태의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동안 경탄을 금치 못했다.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소나무는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반송으로, 수령은 600여 년쯤 되었다. 지금도 거대한 날개를 펼치는 모습으로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보호받으며 매년 정월대보름에 동신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석송령은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개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주민들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사람이 영험한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를 상속하여 등기까지 해주어 수목으로서 유일하게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남편과 같이 백두산을 다녀왔는데, 막상 가기 전에는 그곳에서 많이 서식하는 멋진 미인송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내심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 버스와 지프차를 갈아타고 오른 백두산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강풍과 운무(雲霧)에 휩싸여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백두산을 내려와 우리 민족들이 이주하여 개간을 하던 용정의 간도 지방과 해란강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용정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비암산위에 지어진 일송정을 올려다보았다. 그 자리에 있었다던 푸른 솔은 지금은 간데없고 외로운 정자 하나와 크지 않은 소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낯선 땅에 이주해온 우리민족들이 항상 바라보고 위로를 받던 푸른 소나무는 일제의 만행으로 죽어버리고 일송정이라는 조그만 정자와 그때 심은 평범한 소나무 한그루가 대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아버지도 만주지역인 간도 땅에 가서 한동안 머무르셨다고 했다. 해방이 된 이후이니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벌이를 찾아 나선 길이었지만, 그곳이라고 만만하였을 리가 없었다. 몇 달 만에 초췌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여식을 낳으면 지어주리라고 내 이름을 종이에 소중하게 적어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만주 땅에서 돈벌이 대신 딸 이름을 얻어 오신 것이었다. 오래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 이름을 가진 딸이 어느새 갑년이 넘어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땅에 오게 되니 여러 상념이 밀려왔다.
우리 민족이 남의 나라에까지 밀려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척박한 남의 땅을 일구어 땀 흘리고 씨앗을 뿌리며 거둔 것은 무엇일까.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지만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그 당시 우리 민족들이 정자를 닮은 소나무를 바라보고 한줄기 위로를 받으며 애타게 염원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민족의 상징인 소나무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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