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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색채로 영혼을 깨우다.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11. 2.

 

 

색채로 영혼을 깨우다.

 

한 향 순

 

  올봄엔 우연히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로 해서 사찰을 찾을 일이 잦았다. 만물이 소생하고 죽은 것 같던 마른 나무에서도 꽃을 피워 올리는 4월에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고즈넉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해남의 대흥사를 다녀왔고 신록이 짙어지는 5월에는 친구부부와 너무도 유명한 양양의 백담사를 찾았다. 우리부부는 몇 번 와본 적이 있지만 동행한 친구가 초행이라기에 만해 기념관도 보여 줄 겸, 이쪽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도심에는 벌써 봄꽃들이 지고 녹색의 새순들이 아기 키만큼 올라올 시기였는데, 백담사 계곡에는 청정한 공기 때문인지 아직도 간간이 분홍색 꽃들이 피어있었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진 언덕을 오르며 계곡을 내려다보니, 옛날에 감탄하였던 말갛게 씻어놓은 듯한 하얀 바위와 유리구슬처럼 맑은 옥수(玉水)는 아직도 여전하였다. 드디어 버스에서 내려 앞에 펼쳐진 산들을 바라보니 온통 연둣빛과 녹색의 숲이 물결치듯 바람에 술렁이고 있었다.

 

  백담사 일주문에 도착하니, 울긋불긋 현란한 색채의 연등 행렬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더구나 대웅전 앞에는 모든 사람의 염원과 소망을 담고 높이 매달린 색색의 연등들이 작열하는 햇빛 때문인지 대낮에도 불을 밝힌 듯 머리위에서 황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자가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범상치 않은 기류를 전해주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감사의 기도를 하도록 만들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계절에 다시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나올 수 있게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던 올해 삼월 초순이었다. 오늘 우리와 동행한 친구부부가 경제 침체로 우울해 있기에 바닷바람이라도 쏘이고 회도 먹고 오자며 강릉행을 제안했고, 남편이 운전하는 우리 차에 두 부부를 태우고 주말여행을 떠났었다. 남자들은 차 앞쪽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나름대로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뒷좌석의 여자들도 오랜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느라 방심을 했는가 보았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거의 평창을 지나는 지점에서 차가 코너링을 하는데 갑자기 조수석에 앉은 남편친구가 놀라서 "어! 이차가 왜 이래!"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옆 차선에서 진행 중인 차가 마치 우리 차를 향해 달려드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운전을 하던 남편도 기겁을 해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으니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는 마치 얼음판에서 묘기를 부리듯이 비틀거리더니 급기야는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180도 회전을 한 뒤 마지막 차선으로 튕겨져 나갔다.

 

  정말 눈 깜짝 할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은 남편이 간신히 시동을 걸어 차를 갓길로 이동시키고 우리들을 흔들어 깨웠다. 모두 정신을 차리고 각자 여기저기 다친 곳을 확인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네 사람 모두 뼈가 골절되거나 크게 다친 곳은 없었고 타박상이나 가벼운 중경상 정도였다.

 

  그곳에서 간신히 견인차를 불러 우리가 사는 동네까지 와서 병원에 들어가는 데는 하루 종일이 소일되어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그래도 안전벨트를 착용한 앞좌석의 남정네들 보다 뒷좌석의 여자들이 부상이 심해서 얼마동안은 병원생활도 했지만, 두어 달 만에 모두 건강을 되찾아 오늘 다시 나들이를 떠나온 것이다.

 

  그때 무엇보다 기적 같았던 일은 몇 분 동안이지만 차가 거꾸로 박혀서 진행방향을 보고 서있던 순간에 마주 달려오는 차와 2차로 부딪히는 사고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날은 주말이어서 끊임없이 달려오는 수많은 차들의 행렬을 피해 어떻게 우리가 무사할 수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것은 필시 조상님들의 보살핌이거나 주님의 은총, 혹은 부처님의 가피일지 모르지만 누군가 우리를 지켜주는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 파인더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버린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자주 여기저기 사찰을 찾게 된다. 비오는 날의 물기어린 단청 색깔도 나를 사로잡고, 외줄 하나 늘어뜨리고 바람을 기다리는 물고기 모양의 쓸쓸한 풍경의 모습도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렬하고 환한 색채의 연등을 보며 그 원색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오늘도 어둠과 무명을 밝혀 지혜의 빛으로 마음을 환하게 밝히려는 연등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무리지어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다보면 이 무지한 중생도 시냇물 소리가 진리의 말씀이요. 푸르른 산 빛이 그대로 청정한 부처님의 법신이라는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날이 오지 않겠는가.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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