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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보고 싶다는 말

by 아네모네(한향순) 2010. 2. 4.

 

 

보고 싶다는 말

 

한 향 순

 

 

  전화를 받던 날은 괜히 마음이 설레어서 잠까지 설쳤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 속을 더듬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그토록 보고 싶어 한단 말일까. 혹시 말을 전해준 사람이 이름을 잘못 말한 건 아닐까. 다른 일에 열중해 있다가도 그 일만 생각하면 궁금증과 함께 안테나가 새로운 주파수를 찾듯 신경이 쓰였다.

 

  며칠 전, 핸드폰으로 어느 남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 이름과 고향을 말하고 출신학교까지 확인을 하는데 분명 나를 찾는 전화였다. 자기는 어떤 사람의 부탁으로 나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알아보다가 겨우 주소를 알아내어 지금 우리 아파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인 내가 부재중이라 경비실에 가서 연락처를 물어 겨우 통화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찾는 사람은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며칠 후에, 한국에 다니러오는데 옛 친구를 찾고 싶어 해서 자기가 나서서 수소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해준 이름은 생소해서 기억 속에서 아물거렸다. 여학교시절 친했거나 가까웠던 친구들은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해도 기억이 나건만 그 이름은 예외였다. 기다리던 며칠이 흘러도 연락이 없자 어떤 싱거운 사람이 장난을 했거나, 혹시 개인정보를 빼내서 사기를 치려는 자의 농간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전화 속의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더구나 그 사람이 먼 거리에 있는 우리 집까지 직접 찾아왔다고 하질 않던가. 경비실에 확인을 해보니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한단 말인가." 마치 잔잔하던 강물에 파문이 일듯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은 일상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바람기처럼 나를 들뜨게 하였다. 마치 들으면 들을수록 중독이 되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나는 갖가지 상상을 즐기며 친구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얼마 후, 다시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드디어 친구가 한국에 도착했고 휴대폰이 없어 직접 연락은 못하지만 급한 일을 마친 며칠 후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재차 친구의 이름을 확인하고 깊이 들어있던 낡은 앨범들을 꺼내놓고 퍼즐을 맞추듯이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그러자 중학교 이학년 때, 가깝게 지내던 한 친구가 떠올랐다. 착하고 무던하던 친구 "아! 그 애가 000이었지."그러고 보니 그때는 꽤나 붙어 다녔는지 앨범에도 그 친구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그러나 여고 때는 서로 다른 학교를 선택하여 별로 교류가 없었고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새삼스럽게 수소문해서 나를 찾을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타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다보면 고향에 대한 향수와 소녀 때의 추억이 그리웠을 터이고 그러다보면 옛 친구도 생각났을 거라며 혼자 감상적인 추리를 이어갔다. 나는 단지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는 달착지근한 말에 혼을 빼앗기듯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60이 넘은 요즈음에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일이 있던가. 가끔 외국에 사는 어린 손자들에게 닦달을 하듯 "할머니 보고 싶어? 안보고 싶어?"라면서 "보고 싶다."라는 대답을 강요하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마지못해 "함모니 보고 싶어요."라고 해주는 한마디 말이 솜사탕처럼 가슴에 포근히 안겨오곤 했다.

 

  더구나 오랜 옛 친구가 나를 보고 싶어 하며 찾는다는데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를 만나면 어디로 안내를 해서 어떤 음식을 맛보이며, 어느 곳을 보여줄지 마음속으로 준비도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더니 어느 날 서울 어디에서 몇몇 친구들과 모인다는 문자가 도착 했는데, 그것도 약속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야 내가 보게 되었다.

 

  어렵사리 그 친구와 통화를 하니 이틀 후면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아 나를 못보고 떠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얼마나 기다려온 만남인데...." 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설사 그 친구가 나를 보고 싶어 한 것이 거짓이었거나 전해준 사람의 허풍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다만 요 며칠 동안 누군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달착지근한 말 때문에 살맛나는 기쁨을 맛본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밤늦은 시간,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럽다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친구가 있다는 서울로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옆 좌석에는 조청에 버무린 가래떡과 검은 콩을 듬뿍 넣어 만든 흰무리 떡, 그리고 친구에게 전해줄 나의 수필집과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드디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십년만의 반가운 해후는 이루어졌다.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밤길은 많이 내린 눈 때문인지 어둡게 보이던 골목길이 넓고 환해보였다. 설사 그것이 하얀 눈 때문에 보이는 착시 현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루한 일상의 속에서 조금은 허풍일지라도  따뜻한 한마디의 말이 커다란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은 "보고 싶다"라는 말을 헤프게 남발한다고, 누가 말에  세금을 물리며 흉을 볼 것인가.

 

                                                                                                                                            2010, 1

 

 

 

숙자와 중학교 2학년때의 모습과 50여 년이 지난 후 만난 우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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