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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가을 바람

by 아네모네(한향순) 2011. 1. 4.

 

 

가을바람

 

한 향 순

 

  지난여름은 길고도 지루했다. 예년에 비해 유난히 무더웠고 비도 많이 왔다. 하필 여름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에 이사를 했다. 막상 거처를 옮기려고 묵은 살림을 끄집어내고 보니, 아무리 버려도 끝없이 버릴 것들이 나왔다. 그동안 마치 쓰레기 더미를 껴안고 산 것처럼 짐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관해 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가차 없이 없애야 했다. 버리려다가는 도로 들여다 놓고, 다시 내놓는 짓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하찮은 물건에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하물며 아이들이 자랄 때 입던 교복이나 교과서, 앨범 등은 젊은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어서 끌고 갈 수도 버리지도 못하는 골치 덩어리였다. 본인에게는 애틋한 기억이 묻어있는 낡은 책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쓸모없는 물건처럼 여겨지니 가족끼리도 자기 것은 못 버리고 애꿎은 남의 물건을 버리라고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더구나 쓰던 가구나 집기들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가져다 유용하게 쓸 사람을 물색하는 일도 쉽지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만큼 예전보다는 모든 물자가 흔해진 탓이리라.

 

  또한 멀지 않은 거리지만 그동안 익숙해지고 정이 든 곳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심란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나이 든 사람들의 특성일 것이다. 또한 이사 할 집의 수리를 하면서 크고 작은 일로 사람들과 겪은 실랑이와 이삿짐 회사의 횡포도 더위 못지않게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사를 하던 날, 짐을 모두 들어내고 둘러본 집은 내가 십 년 동안 몸답고 있던 정겨운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마치 매미가 벗어버린 허물처럼 생소하고, 가구들을 들어낸 자리는 폐가처럼 쓸쓸해 보였다. 더구나 표를 달고 폐기물 더미 속에 내팽개쳐진 정든 가구들을 보니 우리와 함께 살아온 세월이 버림받은 것처럼 처량해 보였다. 아무튼 이래저래 힘든 이사를 하고 오래 짐정리를 하면서 이제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절대 사지 말고 조금씩 짐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힘든 와중에 우연히 매미가 우화(羽化)하는 과정을 꼬박 서너 시간 동안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한여름 우기가 끝날 즈음, 땅속에서 수액을 먹으며 오래 기다린 애벌레들은 밤이 되면 허물을 벗기 위해 커다란 나무를 느리게 기어오른다. 한 두 시간쯤 나무를 오르다가 안전한 곳을 찾으면 그때부터 멈추어서 천천히 우화를 시작하는데 정말 놀랍도록 신비스러운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누런 애벌레의 등이 조금씩 옆으로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녹색의 몸체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어느 정도 몸통이 빠져 나오자 배를 드러내던 매미는 머리를 치켜들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두발로 허물을 꼭 움켜쥐고 그곳에 매달렸다. 그 다음에는 푸른 망사드레스 같은 아름다운 날개가 조금씩 펴지면서 멋진 성충이 되어갔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사람이나 미물이나 마찬가지로 정말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그 경이로운 장면을 사진으로 찍기 위해서 손전등을 비추고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덕분에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 처음에는 볼품없는 애벌레의 모습에서 멋진 매미의 성충이 되기까지의 모습을 낱낱이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화를 끝내고 난 매미는 한참동안 자기가 벗어 놓은 허물을 붙잡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 염려스러운 눈길로 얼른 그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한참 후에야 허물을 버리고 천천히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몸을 충분히 말린 후에 성충으로서의 활동이 시작 되며 고작 일주일에서 한 달 남짓 동안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도 우주에서 본다면 매미와 비슷할 것이다. 마치 천년이나 살 것처럼 아옹다옹하며 욕심을 부리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도 결국은 매미가 부여잡고 있던 허물처럼 버리고 가야 할 빈껍데기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옛 선인의 말 중에 '낙출허(樂出虛)'라는 말이 있다. 대충 즐거움은 마음을 비우는데서 온다는 뜻이라는데, 우리 같은 속인이야 그 깊은 뜻을 다 깨닫지는 못한다.

 

  처서를 지나고도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더니,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감촉이 달라지고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몸속을 파고든다. 아무리 위세를 떨치던 무더위도 결국은 두어 달을 못 넘기고 수그러드니 어김없이 다가오는 계절의 순환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두어 달을 못 참고 덥다 덥다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더구나 버튼 하나만 누르면 땀이 쏙 들어가는 냉방기기에 길들여지면서 사람들의 인내하는 능력도 점점 줄어 든 것 같다.

 

  어느덧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나며 창가에 걸어 놓은 풍경이 울린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곡식과 과일이 잘 익어가고 언젠가는 결실을 맺고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우리의 삶도 점차 익어가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올 가을에는 옛 선인이 말씀하신 '낙출허'의 의미를 깊이 새기며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접고 그동안 몰랐던 기쁨을 가득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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