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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한줄기 빛을 찾아서

by 아네모네(한향순) 2011. 2. 25.

 

 

 

한줄기 빛을 찾아서

 

 

한 향 순

 

 

  소녀의 등 뒤로 무지개 색깔의 영롱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학생은 수줍은 듯 가방을 길게 내려뜨리고 좁은 골목을 올라가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허름한 시멘트 담장이 거만하게 서있고, 왼쪽으로는 너무 낡아서 칠이 벗겨진 건물의 외벽이 흉측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소녀는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오르내릴까. 집에는 가족이 몇 명이나 되며 누구와 살고 있을까. 나를 만나자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리던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

 

  모니터 속의 사진을 응시할수록 여러 가지 상념이 밀려와서 머리를 어지럽혔다. 처음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한줄기 빛을 찍은 것이 신기해서 자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사진을 역광으로 찍을 때 강한 빛이 들어와 프리즘 현상으로 만들어진 빛 내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진은 흔히 ‘빛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빛을 잘 구별하여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아야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사진공부를 하면서부터 아름다운 빛을 담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애를 많이 썼다. 보통은 하루 중에 일출과 일몰 전후 두 시간 정도가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주로 그 시간에 촬영을 했다. 그러자니 캄캄한 어둠속에서 집을 나서는 일은 다반사이고 어느 때는 서너 시간이나 새벽추위에 떨며 해가 뜨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또한 역광으로 비치는 한줄기 빛을 잡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발이 푹푹 빠지는 개펄에 들어가기도 하고, 저녁노을 속에 역동적인 파도를 찍으려다 바다에 휩쓸려 들어 갈 뻔도 했다.

 

  그날은 내가 속한 동호회에서 군산으로 출사를 갔다. 처음 들른 곳은 경암동 철길마을이었는데 가운데 철길을 두고 그 옆으로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지금은 운행을 안 하고 있지만 이년 전까지만 해도 기차가 다녔다는 철길에서 불과 2미터도 안 되는 곳에 집들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릴 적 부르던 동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생각나는 동네였다. 지금도 철길 옆, 집 앞에는 국화꽃이나 선인장 화분들이 오밀조밀 머리를 맞대고 있고 늙은 호박이나 시래기도 햇빛을 기다리며 걸려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겠지만 우리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 다음에 간곳은 바다가 보이는 동네라 하여 이름 붙여진 해망동이었다. 해망동은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동네 같았다. 월명공원과 군산선창 사이에 들어선 이 동네는 해방 후, 피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에 부둣가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이루어진 산동네라고 한다. 이 마을의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낡고 작은 집들이 산비탈에 촘촘히 박혀있어 마치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 보였다.

 

  해망동은 산업 근대화시절 활황을 보였던 수산업과 목재, 합판사업으로 80년대 중반까지 활기를 띠우던 삶의 현장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면 밤인데 바다는 벌건 대낮이었제. 천야해일(天夜海日)이라고 들어봤소?” 한 때 항구산업으로 번창했던 군산의 해망동 주민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며 타지 인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지금은 낡고 쇠락한 공간으로 전락했지만 지난 영광과 함께 노인들만 남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마을이 되었다.

 

  2006년에는 뜻있는 미술가들이 모여 <천야 해일>이라는 공공 프로젝트로 해망동을 미술공원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로 같은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니 군산항이 손에 닿을 듯 보이고, 집 앞 빨래 줄에는 덜 마른 생선이나 젖은 옷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더러 쓰레기더미가 쌓여있는 낡은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고, 열려진 문틈 사이로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집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60년대 중반, 꿈에 부푼 마음으로 내가 찾아간 서울의 산동네도 지금의 해망동과 거의 흡사하였다. 여장군처럼 씩씩하고 집안의 기둥 같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청상과부의 외아들이었던 나약한 아버지의 절망과 슬픔은 얼마 가지 않아 파산으로 이어졌다. 여고생이었던 나에게 동생 둘을 맡기고 부모님은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체면을 중히 여기던 부모님이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창피를 모면하려던 일종의 도피였던 셈이다. 곧 돈을 벌어 데리러 온다던 부모님은 오시지 않고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서울의 어느 산동네였다.

 

  열일곱 소녀가 꿈에 그리던 서울은 그저 화려하고 안락한 곳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동네는 지게로 물을 길어 먹고 연탄도 나르는 비탈길 골목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한 나는 그저 놀라웠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더구나 우리 부모님도 계셨다. 서울을 다녀 온 후, 나는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울음이 나오면 목안으로 삼킬 줄도 알게 되었고,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가슴 속 깊이 감출 줄도 알았다.

 

  그날 해망동에서 만났던 사진 속의 소녀도 어쩌면 오래전 내가 겪었던 슬픔을 조그만 가슴 속에 꾹꾹 누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절망하여 꿈을 잃지 말고, 사진에서처럼 영롱한 한줄기 빛을 받아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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