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 어디 있으랴
한 향 순
비몽사몽간에 허우적거리다 잠이 깼다. 깜짝 놀라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아니 이게 무슨 낭패인가. 황급히 핸드폰을 찾아보니 내 옆에 얌전하게 그대로 놓여있다. 어제 저녁 알람을 맞춰놓고 여러 번 확인까지 했는데 울리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궁금해 할 틈도 없이 정신을 가다듬고 기다리고 있을 일행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연락부터 했다. 그리고 전투태세에 임하는 군인처럼 십 여분 만에 장비를 챙겨 살그머니 현관을 나섰다.
오늘따라 마음은 조급한데 엘리베이터 표지판은 빨간 불이 켜진 채 층마다 머물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신 새벽에 누가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닐 텐데 혹시 고장이 난 것은 아닐까. 초조한 몇 분 사이에도 갖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드디어 문이 열리는 순간, 나도 놀라고 안에 있던 사람도 기겁을 했다.
그는 이른 시간이라 안심하고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신문을 배달하던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잠시 어색해하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제 일기예보는 괜찮았는데 밖에 나오니 깊게 가라앉은 어둠속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켠 다음, 잠시 갈등이 생겼으나 곧 망설임을 털어내고 어둠속을 달렸다. 이미 출발시간이 늦었으니 일행들과 도착시간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달리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나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여인이 자꾸 생각났다. 그녀는 칠팔 년 전에 나와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는 젊어서인지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활달한 성격에 운동도 열심히 하며 매사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때보다는 좀 야윈 듯 했고 부스스한 머리와 몸단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일부러 알은체도 못하고 황망히 내렸지만, 젊지도 않은 나이에 왜 그런 일을 선택했는지 궁금증이 더해졌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커서 제 갈 길로 갔을 텐데 힘든 일을 하다니 무슨 일일까. 혹시 젊은 사람들 같으면 운동 삼아 할 수도 있다지만, 그러기에는 이제 힘이 부치는 나이 아닌가. 혹시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알은체를 했다면 그녀는 어찌했을까.
운전을 하면서도 갖가지 상념이 밀려들어 보슬비가 폭우로 변하는 것도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주위는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인데 비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빗물이 고인 도로에 차가 붕 뜨는 것처럼 느껴지자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작동을 하는 윈도브러시 너머로 어디쯤이나 왔을까 살펴보아도 캄캄한 주위는 비와 안개 때문에 분간 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 양평 쪽으로 가는 여러 개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빗줄기도 약해지고 뿌연 안개도 조금은 걷히는 듯싶었다. 양수리 두물머리로 들어가는 골목길로 들어서자 내 뒤를 따르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주차장에 내리니 바로 내 뒤를 따라온 차는 우리 일행들이 타고 온 차였다. 나는 알람만 믿다가 늦게 일어나 약속장소에 못나갔다는 변명을 했고, 그들은 늦게 출발했는데도 빨리 도착했다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씩 뿌리던 비가 다행히 그치는가 싶어 우리는 삼각대와 장비를 챙겨 느티나무가 있는 강가로 내려갔다.
날씨 때문에 멋진 일출을 담지는 못하겠지만, 푸른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건너편의 산과 숲이 아련히 보였다. 더구나 잔잔한 강물위에 외롭게 떠있는 황포돛배와 강에 비친 그림자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무들은 싱싱하게 살아나고 이슬이 맺힌 갖가지 꽃들과 연잎에 구르는 보석 같은 물방울들은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삼각대를 이리 저리 옮겨가며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지 두어 시간이 지나자 날씨는 맑게 개어 더워지기 시작했고 오늘의 행사를 위해서 몰려드는 사람들과 그것을 담으려는 많은 사진사들로 두물머리는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서는 새로 만든 황포돛배의 진수식이 열리기 때문에 여러 가지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새로 만든 배에는 색색의 깃발과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꾸미고, 하얀 돛에는 "굽이치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 어디 있으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강가에는 배가 무사하게 강을 거슬러 오르내릴 수 있도록 비는 고삿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와 서로 몸을 섞고 합치는 곳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발원한 두 강이 서로 만나기까지 물길은 때때로 급한 나락을 만나 굽이치기도 하고 커다란 바위를 만나 소용돌이도 쳤을 것이다. 유장한 세월을 지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강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이다. 황포돛배에 쓰여 있는 글귀처럼 굽이치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 어디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과정이 어찌 순탄하기만 하겠는가. 나도 한때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벽에 떨어진 적도 있었고, 캄캄한 터널 속에서 갇혀있는 절망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 한줌의 빛을 붙잡고 희망을 키우면서 살다보니, 오늘처럼 파인더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며 기쁨을 느끼는 날도 오게 되었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엘리베이터 속의 그녀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당당하게 자기 일을 했으면 좋겠다. 살다보면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날은 밝을 것이고 터널 속에서도 빛은 보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또 다른 삶의 구비가 다가올 것이고 언젠가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다시 웃을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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