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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포토기행(길에서 길을 생각하며)

설산과 양귀비가 있는 천상화원

by 아네모네(한향순) 2015. 9. 15.

 

 

설산과 양귀비가 펼쳐진 천상의 화원

 

한 향 순

 

눈앞에는 하얀 설산이 떡 버티어 서서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설산을 바라보며 무조건 길을 따라 걸었다. “세상에 초여름에 하얀 설산을 볼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신기해서 우리는 힘든 줄도 몰랐다. 어제 밤 내린 비로 길이 망가져서 버스가 더는 오를 수 없다고 해도 일행들은 흥분한 채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큼이나 걸어야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안내자도 없이 그저 설산을 향하여 묵묵히 걸었다. 뒤에서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압도되어 모두 말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녹색의 초원지대가 끝나고 맞은편 언덕에 붉은 점들이 점점 커지면서 무늬를 그리더니 아예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은 초원이 나타났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것이 양귀비 군락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선두대열에서 양귀비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연이어 환호성들이 울려 퍼졌다. 멀리서 붉게 보이던 언덕이 모두 양귀비로 뒤덮인 초원이었다. 하얀 설산이 빙 둘러싼 초원에 빨간 양귀비가 만개한 모습을 보자 ~ 여기가 천상의 화원이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어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은 뒤, 처음 만나는 비경이기에 더욱 감동이 컸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밤새 내린 비가 높은 산악지대에서는 눈으로 변해 도시를 둘러싼 산들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설산들이 바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내려온 텐샨산맥인데, 우리말로는 천산산맥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낭에서 촬영 장비를 꺼내 눈앞에 펼쳐진 기막힌 풍경을 담느라 모두 촬영에 몰두했다. 지금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멋진 풍광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담을 수 있을지 고심하며 마음이 급해졌다. 힘든 줄도 모르고 두어 시간 촬영에 몰두하다보니 우리 일행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모두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아침에 걸어온 길을 되짚어가며 버스가 정차 했던 곳을 찾아내려가니 온몸이 땀에 젖고 이슬에 젖어 행색은 엉망이고, 무더위에 지친 일행들은 무엇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우리를 태운 버스는 덜컹거리며 비포장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중앙아시아의 거인이라고 불리는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중국,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나라이자, 바다와 인접하지 않은 가장 큰 내륙국이다. 1850년경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으며, 19911216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다. 카자흐스탄은 광대한 평원을 가진 국가로 초원과 사막이 매우 넓은데, 또한 우리와는 무관하지 않다.

 

 

 

 

카자흐스탄에는 우리의 동포인 고려인들이 10만 명 정도 살고 있는데, 고려인들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극동지방에 초기 이민자들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중앙아시아 국가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되면서부터이다. 그때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벼농사를 주로 하여 그곳에 농지를 많이 키웠으며, 한인의 높은 교육열과 성실 근면성을 인정받아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주요 소수민족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잠불주로 이동하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대 평원과 갖가지 야생화, 그리고 만년설산을 다시 만났다. 여행 첫날 만났던 양귀비 초원은 길을 가다보면 수없이 많이 볼 수 있고 흰색과 노랑의 야생화들도 대지의 예술작품처럼 색색으로 펼쳐 있었다. 우리의 여행 목적이 사진촬영이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멋진 풍광을 만나거나 양이나 말을 몰고 가는 유목민들을 만나면 어느 때고 차를 세우고 사진촬영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유난히 길가에 꿀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는데, 자세히 보니 넓은 평원 곳곳에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트럭을 유심히 살펴보니 트럭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것은 양봉을 하는 상자들이었다. 말하자면 꽃을 따라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이동식 양봉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간편한 취사시설이나 잠잘 곳도 있는 것 같았는데, 지천으로 깔린 꽃을 따라 이동하며 꿀을 채취하는 것 같았다.

 

 

 

콜사이 호수는 알마티에서 300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천산산맥의 빙하가 녹은 물이 모여 아름다운 세 개의 호수를 만든 곳이다. 그중에 우리는 첫 번째 호수에 올랐는데, 짙은 블루의 물빛에 설산의 반영이 그대로 데칼코마니를 만든 무척 아름다운 호수였다.

 

콜사이 호수를 가기 위해서는 산 밑 작은 동네에서 민박을 해야 하는데, 시골집이 어찌나 정갈하고 깨끗한지 놀라웠고 뛰어난 음식솜씨와 따뜻한 안주인의 환대에 푸근한 시골 외갓집에 온 기분이었다. 주로 유목을 하는 동네주민들은 아침이면 양이나 소를 몰고 초원으로 나가 풀을 뜯기고 저녁 무렵이면 석양아래 가축들을 몰고 집으로 오는데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양떼를 몰고 오는 목동들의 모습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착한 목자의 거룩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들른 곳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카자흐스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작은 그랜드 캐넌이라 불리는 챠른 계곡이다. 알마티와 콜사이 호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해서 형성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깊은 협곡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과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한국인에게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아직은 관광 인프라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어느 때는 몇 시간을 달려도 휴게소를 만날 수가 없어 가져간 라면을 끓여 먹거나 딱딱한 빵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는데, 그것도 지나고나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고 추억이 되었다.

 

전체의 길이는 154Km나 되는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돌리나 참코프"라는 곳으로 번역을 하면 "성들의 협곡"라고 한다. 그랜드캐넌을 두 번이나 가보았어도 모두 볼 수 없듯이 이곳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되고 체력이 받쳐준다면 트래킹으로 협곡 아래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몇 만 년 동안 비와 바람으로 침식작용이 일어나고, 지각변동으로 인고의 세월을 안고 만들어진 아름다운 협곡을 보며 사람도 오랜 풍상을 겪고 나면 저런 아름다움이 배어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5, 9,10월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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