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청정호수의 나라 키르기스스탄
한 향 순
차창 밖 거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였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3,40년쯤 세월을 거꾸로 돌린 시간 속에 있는 듯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는 키르기스스탄을 오게 된 것은 묘한 인연이었다. 올봄에 카자흐스탄으로 사진출사 여행을 갔었는데, 만년설이 쌓인 천산산맥의 설경과 넓은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의 군락지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상이변으로 점점 더워지는 날씨 때문인지 우리가 예상했던 야생양귀비는 벌써 만개의 시기를 지나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리더가 편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카자흐스탄 바로 옆에 인접해 있는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보는 것이었다. 다행이 한국인은 키르기스스탄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으며 거리도 한나절이면 갈 수 있었다. 비록 이틀 동안의 외도였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나에게 잊고 있던 유년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 같은 것이었다.
그 나라에는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와 비슷한 분위기의 가난한 동네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미루나무가 양쪽에 늘어선 흙길로 된 신작로를 보자 먼 세월 속, 그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던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뒷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더구나 아직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그곳 사람들의 고운심성과 따뜻한 인정이 귀국을 하고 나서도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마침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 동생의 알선으로 안내를 해줄 사람을 만났고 삼 개월 만에 이 나라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되었다. 키르기스스탄은 우리의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조금 작은데 90프로가 산악지대인 산악 국가이다. 인구는 겨우 600백만 정도인데 그나마도 돈벌이를 하러 외국으로 나간 사람들이 백만 명 정도이고 자국에는 겨우 오백만 명이나 될까 말까한 인구라고 한다.
가을에 올까 했지만 안내인이 송쿨 호수를 보기위해서는 더는 늦출 수 없는 일정이라고 했다. 송쿨 호수는 해발 3016미터 지점에 위치한 고산 호수이며 겨울이 길기 때문에 지역 유목민들도 짧은 여름에만 이곳에서 소, 말, 양 등의 가축들과 함께 생활한다고 한다. 그곳에는 광활한 초원 위로 하늘과 구름, 호수와 별이 전부이며, 사람들은 자연과 하나 되어 문명을 초월한 경험을 갖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청정지역으로 지정된 나라이기도 하다. 나도 그곳에 가면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왕방울만한 별 사진을 찍고 싶었다.
송쿨 호수는 “하늘아래 마지막 호수”라는 뜻이라는데, 예전에 가보았던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보다 두 번째로 넓은 호수는 이식쿨 호수이고, 두 번째로 높은 호수는 송쿨 호수라고 한다. 여행 첫날 고산 대비훈련으로 2,000미터쯤 되는 알라 아르차 공원을 올랐고, 다음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송쿨 호수를 오르기 시작했다. 사륜구동인 지프차를 타고 황량한 산자락의 구절양장처럼 휘어진 길을 오르는데, 자동차가 곧 굴러 떨어질 것 같아 가슴을 졸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하늘을 보니 아쉽게도 하늘은 여전히 흐려있고 두터운 구름에 가려 설산도 호수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이 하시는 일을 어찌하겠는가. 일출은 포기한 채 송쿨 호수의 아침 풍경을 담기위해 바삐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날이 밝고 짙은 구름사이로 호수를 둘러쌓은 설산이 보이며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키르기스스탄의 황량한 토양에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천산산맥에서 내려오는 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데, 50여개의 강줄기가 모두 호수로 모여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바다 같은 이식쿨 호수는 그 면적이 제주도의 4배라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식쿨은 “뜨거운 호수(hot lake)”라는 뜻으로 사계절 호수가 얼지 않아 옛 소련 시절부터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였고, 호수에서 수영과 각종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었다. 눈 덮인 설산으로 이어지는 주변 계곡에는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스카스카 협곡이나 선사시대의 암각화 유적지가 몰려있어 박물관 역할도 하고 있다.
마지막 언덕을 숨차게 오르니 넓게 펼쳐진 초원에 하얀 유르타가 조가비를 엎어 놓은 듯이 간간이 보이고 양과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유르타는 몽골의 게르 같은 유목민들의 이동식 주거 공간이자 관광객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낮에는 햇볕이 쨍쨍하던 날씨가 막상 송쿨 호수에 오르니 먹구름으로 바뀌고 하늘에서는 금방 비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고원에 올라오니 갑자기 으스스 할 정도로 추워졌다. 우리는 예약한 유르타에 들어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주위는 벌써 어둠이 몰려오고 안타깝게도 가랑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한쪽 유르타에는 우리의 저녁식탁을 근사하게 차려 놓았는데, 현지 식으로 그들의 주식인 둥그런 빵과 양고기와 과자와 사탕까지 골고루 있었다. 유르타 안에는 장작난로가 유일한 난방 기구였는데, 우선 가축의 배설물을 잘 말려서 쌓아 놓았다가 불쏘시개로 사용한 다음 장작에 불을 붙였다. 우리가 잠을 잤던 곳에도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면 밤새 교대로 일어나 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어야 했다. TV나 스마트 폰이 없는 원시의 천국에 밤이 깊어갔다
호수에 가까이 다가가서 수영을 하거나 수정처럼 맑은 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좋지만, 유람선을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선상에서 호수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일품이다. 우리가 유람선을 탔을 때는 현지의 중년 부인들의 야유회가 있어 그들의 놀이문화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호수에 가까운 초원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만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을 끌어안는다.
호수 주변은 한참을 가도 인적을 느낄 수 없는 곳이 허다하며 어떠한 오염원도 찾을 수 없다. 아직 개발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하면 이곳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을까. 아무튼 높은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다같이 거대한 청정호수를 만들었으니 진정 신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염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순수의 나라. 자연에 순응하며 계절 따라 주거를 옮기며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의 후예들이 사는 방식을 엿보는 여행이었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나 법승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에 젖어본다.
격월간지 <여행작가> 1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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