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의 그늘
한 향 순
목을 한껏 뒤로 젖히고 키가 큰 소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이 보이고 강한 햇빛이 나뭇잎에 교차되어 눈이 부셨다. 몸을 이리저리 낮춘 후에야 겨우 커다란 나무의 솔잎들을 자세히 올려다 볼 수 있었다. 듣던 대로 거목들은 푸르고 청정했다. 더구나 솔숲에 들어오자 코끝에 감기는 솔향기와 시원한 바람이 오감을 깨어나게 했다.
친구들과 일박 이일 나들이 길에 울진에 있는 금강송 군락지에 들렸다. 평소에도 잘생긴 소나무를 좋아해서 전국의 유명한 소나무 숲을 찾아 여기저기 사진 촬영을 하러 다니던 터에, 우연히 울진의 금강송 군락지를 만난 것이다. 아름드리 소나무의 수피를 만져보기도 하고 나무의 냄새를 맡아보면서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금강송은 위로 곧게 뻗어 키가 크며 표피가 붉어 적송이라고도 불리는데, 속이 노랗다고 황장목으로도 불린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금강송은 주로 금강산 지역에서 많이 난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으며, 나무가 단단하고 곧아서 궁궐을 지을 때 목재로도 많이 쓰인다. 울진의 금강송은 숙종 때부터 황장봉산(黃長封山)으로 지정되어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 나무를 베지 못하게 관리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어떤 나무보다 고결한 기상과 웅장한 기품이 있는 소나무를 많이 좋아했다. 겨울이 와도 의연한 자태를 바꾸지 않는 꿋꿋한 소나무의 모습에서 옳은 일을 위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나무중의 소나무가 으뜸이라는 백목지장(白木之長)이라는 말과 함께 소나무에 관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의연한 선비정신을 갈고 닦았다.
얼마 전 <계간수필>에서 주관하는 <김태길수필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수필계의 너무도 큰 거목이셨고 철학자이셨던 우송 김태길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만든 상이었다. 그 자리에는 제1회 수상자와 그의 가족 외에도 수필계의 원로선생님이나 중진들이 많이 모여서 생전의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수필계의 말석으로나마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던 나도 자연스레 우송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 올리며 대화에 끼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큰 행운이었다. 25년 전, 수필을 배우려고 한국일보 문화센터에서 수필 강의를 듣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의 수필은 해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어서 우리 수필반의 강의 교재로 많이 쓰였기 때문에 정작 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90년대 초,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먼발치에서 처음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키가 크고 꼿꼿하신 모습이 늠름한 소나무 금강송을 연상하게 하었다. 더구나 선생님의 호가 우송(友松)이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때만 해도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정곡을 찌르는 말씀에 매료되어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다. <외로움과 외롭지 아니함>이나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등 선생님의 글을 읽고 수필공부를 했으며, <글을 쓴다는 것>과 같은 작품은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지침서처럼 몇 번이나 읽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선생님을 가까이 뵙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이 설레었는지 모른다. 2005년, <에세이 21>창간 1주년 기념 세미나가 있었는데,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특명을 받은 것이었다. 그 당시 산영문학회장을 맡고 있었고, 우리 집이 선생님 댁인 분당과 가까운 용인 수지여서 자연스레 그 역할을 맡았지만 며칠 전 부터 많은 걱정이 되었다. 선생님 댁 주소를 찾아내어 대강 위치를 확인하고, 도심의 식장까지 걸리는 시간과 주차하는 시간까지 계산하여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선생님을 모시고 가야되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더구나 한 시간 가까이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서 어떻게 해야 어색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을지 며칠 전부터 고민을 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 미리 길을 익히려고 예행연습까지 하고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반갑게 맞아 주시며 선생님이 쓰신 철학서적에 친필로 서명을 해서 주셨다.
드디어 선생님을 뒷좌석에 모시고 오면서 운전을 하는데, 뒤통수를 보이며 이야기를 하려니 얼마나 죄송한지 몰랐다. 그래도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의 수필 중에 해학적인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원래 성품이 재미있으신가보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타고난 성격은 그렇지 않았는데 오래 전부터 유머의 중요성을 깨닫고 많이 연구하고 노력을 하셨다고 한다. 딱딱한 교훈이나 무거운 설교보다는 멋스런 유머 속에 자기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은근히 담아 전달하는 것이 청중에게나 독자에게 훨씬 설득력이 있고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꼿꼿한 학자 생활을 하시면서도 일찌감치 유머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을 하셨다는 것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이제 선생님이 떠나신지 오년이 넘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글은 수필인 들에게 영원한 지침이 되고 선생님의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커다란 그늘은 안식처가 되어 줄 것이다. 그 후, 나는 뒤늦게 선생님이 만드신 한국수필문학진흥회와 수필문우회 회원이 되어 선생님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오늘도 금강송 군락지에서 늠름하고 꿋꿋한 푸른 거목을 보며 선생님을 떠올린다.
< 계간수필> 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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