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인형
한 향 순
맑은 하늘에 연신 아이들의 웃음이 까르르 터진다. 손자들과 떠나온 여행길에서 두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장난치고 웃고 떠들곤 한다. 하기는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고 장난기가 많은 아홉 살과 열두 살, 사내 녀석들이니 그럴 만도 하리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호주에서 방학을 이용하여 손자들이 놀러왔다. 저희 부모는 바빠서 같이 오지 못하고 저희들끼리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이다.
기껏 일 년 에 한번이나 볼까 말까한 손자들이니 반갑기도 하고 무엇인가 기억에 남을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결정한 것이 손자들과 함께하는 유럽여행이었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미리 여행사에 예약을 하고 오래 기다렸는데, 막상 여행일자가 다가오니 여행사에서 인원이 차지 않아 우리가 예약한 상품은 취소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도 미리 여행계획을 말해주어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여행사의 무책임한 처사에 불만을 토로해보았자 소용도 없고, 부랴사랴 다른 곳에 예약을 하여 허겁지겁 떠나온 여행이었다. 준비도 미흡하고 여유도 없었지만 우선 저지르자는 마음으로 결행을 하였다.
여행준비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노후자금을 걱정해야하는 우리에게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추운 겨울이라 우리 부부의 짐만 해도 꽤나 많은데 아이들 짐까지 챙기려니 준비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혹독한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니 옷부터 신발과 모자, 장갑까지 겨울용품 일체를 준비해야 했다. 그래도 저희들 짐은 스스로 챙기라고 배낭과 작은 트렁크를 각자 쥐어주고 힘든 경험을 하게 했다.
기껏해야 서유럽 4개국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돌아보는 패키지여행이지만 엉겁결에 떠나온 우리와는 달리 아이들은 귀로 듣기만하고 처음 와보는 유럽의 나라들이 신기하고 많이 궁금한 것 같았다. 더구나 방학 때라 그런지 우리 일행 중에 학생들이 더러 있어 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여행의 재미를 한껏 누리는 듯 헸다.
우리 부부가 처음 서유럽을 여행한 것은 꼭 30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행자유화가 되기 전이니 해외여행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하는 것으로 알았다. 여권을 만들기도 어려웠고 가까운 나라를 잠깐 나가려고 해도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만 했는데 반공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남편이 2년 동안의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을 하면서 큰맘 먹고 유럽여행을 하자며 비행기티켓을 보내왔다. 그때는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 아이들도 어리고 걸리는 것이 많았지만 모든 것을 제쳐놓고 남편의 뜻을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 산동네에서 연탄불이나 갈며 아이들과 지지고 볶던 아줌마에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유럽의 나라들은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놀라웠고 신기하기만 했다.
소설 속에서 읽었던 파리지엔들이 고뇌에 차서 바라보던 세느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황홀하였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사고, 샹젤리제 거리에서 리도쇼를 보고 와인을 홀짝거리던 날은 내가 화려한 파티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우쭐하기도 했다.
더구나 도시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로마의 수많은 유적과 오래 된 건축물 사이를 걸으며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오드리 헵번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스페인 광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며, 코스메틱 성당에 비치된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다. 트레비 분수에서는 꼭 로마에 다시 오기를 기원하면서 수없이 동전을 던졌다. 그 동전의 효력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꼭 30년 후에 다시 로마에 오게 되었다. 그것도 한 세대를 걸러 손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30년 전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우리는 초로(初老)의 여행자가 되어 이곳을 다시 찾고 보니 여러 가지 상념이 교차하며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관광지들이 역사의 숨결 속에 고스란히 남겨진 것을 보니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의 역사가 대단해 보였다.
그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기념이 될 만한 것을 고르다가 내가 들른 여행지마다 조그만 민속인형들을 사가지고 왔다 그 당시에는 귀하던 눈을 깜빡이는 파란 눈의 프랑스 인형이나 이태리의 드레스 차림의 귀부인 인형. 스위스의 알프스 소녀와 영국의 근위병 등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내 발자취가 담긴 세계의 조그만 인형들이 우리 집 장식장을 하나 둘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형들이 오래되어 팔이 빠지고 색이 변하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우리 여행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바르셀 푸르스트는 말했다. 훗날 우리 아이들이 이번 여행을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좀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할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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