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한 향 순
올해도 그곳에는 어김없이 과꽃이 피어있었다. 과꽃은 진분홍과 보라색이 골고루 섞여서 정말 꽃밭 가득 예쁘게 피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맘때면 과꽃을 보려고 집에서 가까운 민속촌에 들리곤 했다. 그곳에 가면 사라져가는 풍습이나 옛것을 만나는
반가움에 가끔 찾아가곤 했는데, 어느 해 초가을 초가집 꽃밭을 가득 메운 과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요즘 도심에서는 외래 원예 종에 밀려 보기 힘든 꽃이었기 때문이다. 꽃도 시대의 풍조와 유행을 따르는지 우리가 어렸을 때는
꽃밭에 가득 핀 과꽃을 많이 보고 자랐다. 한여름에는 울안에 해바라기와 봉숭아꽃이 피다가 곧이어 맨드라미와 과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과꽃>이라는 동요에서는 과꽃을 보면 시집간 누나가 생각난다고 했지만
나는 이 꽃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대가족의 며느리로 힘든 생활 중에도 꽃 가꾸는 것을 좋아하셔서 옛날 우리 집 마당에는 채소보다는 꽃들이 철마다
피고지고 하였다. 심지어 마당이 없던 일본식 목조 이층집에 살 때는 찌그러진 양동이나 깨진 그릇, 하물며 나무로 엮은
박스에다가 꽃을 심어 옹색한 골목에 가지런히 키우곤 하셨다. 어쩌면 가난하고 힘든 어머니의 일상에 꽃이 조그만
위안이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꽃이 한창일 때면, 과꽃 몇 송이를 꺾어 투명한 유리병에 꽃아 놓아서 색색의 강렬한
색채에 집안이 다 환해지곤 했다.
십여 년 전, 지병으로 오래 앓고 계시던 어머니를 뵈러갔더니 아프신 와중에도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정리를 깔끔하게
하셔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철쭉이며 싱싱한 꽃들을 볼 수 있었다. “성한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을 아픈 어른이 하시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라고 성화를 하면 “이것들도 산 생명인데 쳐다봐주고 돌봐주어야지. 그것도 못하면
죽은 목숨이지 어찌 살았다고 할 수 있겠냐.”라며 오히려 우리를 책망하셨다.
어머니 말고도 꽃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결혼을 해서 너 댓살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같은 동네에
아이들도 비슷하게 두었고 취미도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 좁은 대지에 집만 크게 지어놓은 우리 집과는 달리 친구네 집은
오밀조밀하고 아담한 예쁜 집이었다. 무엇보다 그 집이 부러운 것은 앞마당에 넓은 꽃밭이 있는 것이었다. 꽃밭에는 부
지런한 친구가 철마다 꽃을 심어 언제나 화사하고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주말이 되어야
마음 놓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친구 집에 찾아가서 꽃밭을 보고 차를 마시며 아이들 이야기나
책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네 집에는 무엇보다 책이 많아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신간서적은 모두 빌려 볼 수 있었다.
바쁜 생활에도 글쓰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도시락 편지’라던가 가끔 잡지에 응모를 하여 글이 실리곤 했는데,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런 일들이 너무 부러워서 나도 언젠가는 꼭 글을 쓰리라 다짐하였다.
나의 롤(role) 모델이자 닮고 싶은 언니 같기도 한 친구였다.
같은 동네에서 오래 친하게 지내던 우리가 아이들이 커가자 다른 동네로 뿔뿔이 헤어져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주거문화도 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하고 우리는 한 동네에서 오순도순 살던 시절을 잊고 서로 바쁘게 살았다.
그저 가끔씩 만나서 사는 이야기도 하고 커가는 아이들 이야기도 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우리도 조금씩 늙어갔다.
이제 아이들도 모두 커서 부모 곁을 떠나고 우리는 한가한 노후를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몇 십 년 동안 직장과 집안일을 병행하며 늘 동동거리며 살던 친구가 이제는 하고 싶던 여행도 실컷 하고 쓰고
싶던 글도 마음껏 쓰리라고 좋아하곤 했다. 그러던 친구가 근래에 많이 아팠다. 생과 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병마와 씨름하다가 다행히 낫기는 했지만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 체중이 40킬로까지 빠지고 말았다. 모든 세상만사가
마음먹은 대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아는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건강을 조금씩 회복하는 그녀가 요즘 가장 재미있어하는 일은 옛날처럼 꽃밭을 가꾸는 일이다. 시골에 조그만
전원주택을 마련하여 집주위에 꽃을 심고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즐겁다고 했다. 처음에는 몇 종류만 심더니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들어와 볼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한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는 옛날 화곡동
집에서 보던 채송화나 봉숭아, 해바라기도 있고 알록달록한 과꽃도 많이 피어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신명이 나고 살맛이 나는가보다.
항상 말수가 적고 조용하던 친구가 꽃밭 이야기만 나오면 스마트 폰을 보여주며 꽃밭 자랑에 침이 마른다.
삼십년이 넘게 내 생일을 잊지 않고 꼭 책을 선물하는 친구. 부디 그녀가 아름답게 꽃밭을 가꾸듯 아프지 말고
노후의 삶을 예쁘게 가꾸기를 바랄뿐이다.
< 계간수필 > 2015, 겨울호
'나의 글모음 > 수필집 ( 인연의 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입견과 편견 (0) | 2016.03.21 |
---|---|
서생원의 변 (0) | 2016.02.18 |
당신은 행복한가요? (0) | 2015.12.27 |
오래 된 인형 (0) | 2015.03.14 |
빛을 찾아가는 여정 (0) | 2015.03.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