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찾아가는 여정
한 향 순
선생님이 가신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나 가끔 선생님을 컴퓨터 화면 속에서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고 꼭 어딘가에 계실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오늘도 사진파일을 정리하다가 하얀 서리꽃 속에 서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작년 이맘때 상고대를 찍으러 춘천의 소양5교에서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작년 그날도 기온이 영하 20도 가깝게 내려간다는 예보를 듣고 우리 일행은 좋은 기회를 놓칠까봐 새벽같이 춘천으로 달려갔다. 전 날 내린 눈으로 길은 미끄러운 살얼음판이고 추위는 몇 년 만의 혹한답게 무척 추웠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천변에는 하얀 너울을 쓴 것 같은 상고대가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상고대는 영하의 온도에서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물방울이 나무 등의 물체와 만나 생기는 것으로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어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추운 것도 잊고 정신없이 몇 시간을 촬영하다가 드디어 철수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늑장을 부리다보니 일행들이 보이지 않고 당황한 김에 급히 쫓아가다가 꽁꽁 언 얼음판에 온 몸을 내던진 것이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가늠도 되지 않고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야 일행들이 간신히 알아채고 달려왔는데 바로 홍선생님 때문이었다고 한다. 멀리서 촬영을 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아니 저기 있는 사람은 이 추위에 얼음판에 누워서 사진을 찍네.”하시더란다. 일행들은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내가 얼음판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 어느 사진동호회의 모임에서였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오는데 우연히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함께 오면서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뒤로 같은 동호회모임을 하며 일주일에 한번 정도 촬영을 다녔는데, 사오 년 동안을 함께 다니면서 취미활동을 해왔다.
그 당시 고희가 넘은 선생님은 우리와 함께 다니는 것이 힘이 부치셨을 텐데도 전혀 내색이 없으셨다. 사진에 대한 열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았으며 사진에 대한 해박한 지식 또한 우리가 따라 갈 수가 없었다. 토론을 하다가 서로 모르는 것이 나오면 나중에 끝까지 찾아보고 알아내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곤 했다. 또한 오랜 신앙생활 때문인지 겸손이 몸에 배인 분이었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베풀려고 하셨기에 우리는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받기만 했다.
그러기에 건강이 좀 나빠지셨다가 회복되는 일이 반복되어도 당연히 털고 일어나시리라 믿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우리 부부가 댁으로 찾아 갔을 때, 선생님은 아주 수척해진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우리에게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이나 회한은 별로 없다는 것,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병원에서 연명치료는 하지 않고 자연사를 택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주변도 거의 정리를 하셨고 남은 것은 정들었던 사람들과 이별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기운이 자꾸 떨어진다고 하셨다. 차를 돌려서 떠나려는 우리를 전화로 다시 부르시더니 깜빡 잊으셨다며 아끼시던 책 한권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그리고 얼마 뒤, 결국 선생님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셨고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마지막 소망이 그동안 촬영한 작품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고심을 하던 끝에 부랴부랴 작품을 골라 액자를 맞추고, 초대장을 띠우고 초스피드로 전시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이 입원해 계신 병원 로비에서 사진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사진전시회의 제목은 <빛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동안 선생님을 좋아하고 아끼시던 분들이 조촐하게 모여 전시회 오프닝을 하였다. 그리고 선생님께 드리는 글을 읽었다.
“고희(古稀)가 넘어 사진을 시작하고 우리 곁에 오신 선생님은 다른 별에서 온 어린왕자처럼 해맑은 소년 같았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사진에 관한 깊은 탐구심은 물론 우리에게 늘 좋은 정보를 알려주셨던 자상했던 선생님.
그러면서도 몸에 배인 겸손함과 남에게 드러나기 싫어하는 겸허함으로 우리에게 늘 귀감이 되셨습니다.
항암치료를 하는 힘든 과정에서도 사진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고 몇 년 동안 사진공부를 함께 하면서
저희는 선생님께 배운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저희들 노후의 롤 모델이 되셨고
우리 모두 선생님을 닮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여기 그동안의 선생님의 작품을 모아 세상에 내보입니다.
선생님의 꿈과 열정이 녹아있고 그동안 저희와의 정과 추억이 담겨있는 뜻 깊은 작품들입니다.
부디 힘내시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저희 모두의 사랑과 염원을 가득 담아서 올립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건강이 악화되어 끝내 전시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사모님이 대리로 오셔서 꽃다발을 받으셨다. 그리고 전시회를 마친 며칠 후, 끝내 숨을 거두셨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전시작품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여 아픈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이름이 새겨진 병원 로비에는 아직도 선생님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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