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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달맞이꽃을 보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5. 3.

 

 

달맞이꽃을 보며

 

  아침부터 바람 한 점 없는 찌는 듯한 날씨였다. 친구에게서 달맞이꽃을 보러 오지 않겠느냐고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야생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예전에 어떤 문우의 글에서 달빛을 받아 달맞이꽃 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마치 음악 소리 같았다는 수필을 읽은 적이 있어서 그 꽃에 대해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꽃의 생김새도 잘 모르지만 이 무더운 한낮에 달맞이꽃이 피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집에서 두어 시간쯤 걸려 신도시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니 시원하게 뚫린 도로와, 그 옆의 가로공원은 마치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해서 온통 잡초와 들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여름철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개망초 사이로 키가 큰 노란 꽃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먼 곳에서 볼 때는 노란 색깔 때문인지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꽃은 노란 나비가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것처럼 꽃잎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달맞이꽃은 원래 아메리카에서 귀화된 꽃인데 달빛 속에서만 핀다고 하여 월견초(月見草)라고도 하며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야생화로 알고 있다. 꽃의 키는 어른의 허리쯤 오는데 꽃대는 곧게 뻗어 뾰족한 잎을 얼기설기 달고 있는 모양이 마치 노란 저고리를 입고 수줍어하는 새색시 모습 같이 느껴졌다.

 

  친구는 자기가 이 길을 달릴 때마다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 반겨주는 것 같더라고 호언하던 말이 쑥스러웠던지, 만개한 꽃을 보여주지 못하여 몹시 미안해하였다. 우리는 이글거리는 햇볕을 머리 위로 받으며 달맞이꽃이 피어 있는 길을 말없이 걸었다. 온몸은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의 열기로 인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시원한 소나기 한줄기가 지나가고 있는 듯 했다.

 

  그 친구와 오랜 우정을 키워 왔고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별로 허물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사소한 일로 서로 마음을 상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의 관계란 가깝고 친할수록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나도 그랬다. 내가 친구를 좋아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만큼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기보다는 나를 배려해 주지 못하는 그가 섭섭하기만 했다. 그런 소견 없는 생각들이 어떤 상황에 부딪혀 불쑥 말이 되어 나왔고, 그것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독이 되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은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빗나간 화살처럼 어긋난 감정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시간은 자꾸 흘렀다. 단지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치기(稚氣)스러운 감정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고, 그리고 친구와 지내 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를 곰곰이 되 삭여 보고 싶었다.

 

  처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나하고는 다른 모습에 막연한 신비감이 들고 그런 것이 호기심을 일으켜 서로를 알고 싶어 하고 가까워지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감동하기도 하고, 가까이 서 본 상대방의 모습에서 실망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일 것이다. 그 친구와도 오랜 시간을 같이 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 지내 왔다.

 

  오늘 그가 달맞이 꽃밭으로 나를 초대 한 것은 나에게 달맞이꽃을 보여주려는 의도보다는 화해의 의미인 것을 안다.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친구는 역시 큰 가슴을 지닌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의 너그러운 모습 앞에서 마냥 옹졸하고 왜소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커다란 트럭이 휘몰고 간 바람 탓일까. 달맞이꽃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웃는 것 같다. 예전에 어떤 꽃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좋아했던 어느 시인의 「달맞이꽃」이라는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어둑새벽 강가에서 너를 만난다. / 아린 그리움 한 소절 같은 노란 나비 떼 / 젖은 날개 펴고 풀숲에 앉아 / 지난밤 달그림자 꿈에 젖어 있는 / 네 조용한 생(生) 위에 앉았다 가는 것이 달빛이더냐.

 

  나는 그 동안 달맞이꽃에 대한 시나 수필을 읽으며 막연히 아름답고 신비스런 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여름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가 바로 그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주위에서 가깝게 볼 수 있는 꽃이기에 더 친근감이 가고 애착이 가는지 모르겠다. 마치 오래 되어 편안한 친구가 좋은 것처럼....

 

                                                                                                                                                        199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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