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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순애 이야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5. 3.

 

순애이야기

 

  버스터미널까지 순애를 배웅하고 집에 들어오니, 순애가 가져온 짐 보따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까 그 애가 일일이 가르쳐주며 봉지를 열어 보였는데도 그때는 건성으로 들었는지 꾸러미들은 생소해 보였다.

새삼스레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보니 고춧가루가 한 되쯤 들어있고 깨와 콩이 조금, 메주가루와 풋마늘에 양파, 풋고추까지 봉지마다 담겨 있었다. 넉넉지 않은 시골살림에 시어른을 모시고 살면서 이만큼이나 챙겨오려면 여려 날 눈치를 보면서 준비했으리라.

 

  순애가 어제 저녁 전화를 해서 내일 새벽차로 서울에 온다고 일방적인 통보만 하고 전화를 끊었을 때 사실은 반가움보다는 또 무슨 일일까 하고 걱정부터 앞섰다. 하루 종일 내 볼일도 접어두고 순애를 기다리기도 지루했지만, 서울지리도 서투르고 한글도 모르는 처지라 꼭 터미널까지 나가서 데려와야만 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찾아오라고 했다가 길을 잃고 반나절이나 헤맨 경험이 있어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순애와 내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십여 년쯤 전이다. 결혼을 해서 둘째아이를 가지고 몸 풀 때를 기다리는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께서 스무 살이나 됐음직한 처녀를 데리고 오셨다. 영문을 몰라서 의아해하며 물었더니, 내가 해산을 하면 어머니가 돌봐주셔야 하는데 와병중인 아버지 때문에 대신 나를 돌봐줄 아이를 구해오신 거였다.

 

  순애는 딸만 있는 가난한 집에 셋째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개가하는 바람에 자매는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 양녀로 가거나 고아원으로도 가고 자기는 언니 집에 얹혀살다가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이 고마워서 일을 했고, 나중에는 월급을 준다는 집을 찾아 여러 집을 전전했지만 변변히 돈도 못 받고 구박만 받다가 우연히 어머니가 알게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순애는 고생에 찌든 아이답지 않게 밝고 명랑했다. 단순하고 철이 없어서 가끔 일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심성이 착하고 고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몸을 풀고 난 후 두 아이들을 제 동생같이 귀여워하고 예뻐했다. 그렇게 삼년쯤 데리고 있다 보니 한 가족처럼 스스럼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고 계속 순애를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 다른 곳으로 가라고 권유를 했지만 그 애는 들은 척도 안했다.

 

  하는 수 없이 농사를 지으시는 시어머님의 힘을 덜어드리기 위해 순애를 설득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문화생활을 하던 도시에 살다가 힘든 시골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순애는 우리 집과 인연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흔쾌히 승낙을 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어쩌다가 내가 시댁에 가면 마치 친동기를 만난 듯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하곤 했다. 그러나 워낙 부지런하고 알뜰하신 어머님 눈에 순애가 탐탁할 리가 없었다. 반년쯤 후에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온 그 아이에게 무슨 기술이라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해줄까 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고향에 있는 아이 언니한테서 시집을 보내야겠으니 순애를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다. 선을 보고 온 후 순애도 싫은 기색이 없고 다행히 남자 쪽에서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서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시부모와 시동생도 많고 농사를 짓는다기에 내심 말리고 싶었으나 순애와 언니가 허락을 하는 바람에 그냥 결혼을 시켰다.

 

 순애를 시집보내고 나는 마치 짐을 벗은 듯 그 아이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몇 년째 소식이 없던 그 애가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견디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힘들더라도 잘 참고 견디라는 말뿐이었다. 자랄 때 갖은 고생을 하며 컸으니 시집가서라도 남편과 시부모님 사랑받고 잘 살아주었으면 했는데 고생스럽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전화가 오곤 했는데 비슷한 하소연과 꼭 한번 자기 집에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순애의 집이 멀기도 했지만 나는 매정하게도 그 애의 집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것은 순애가 나에게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어쩌면 그의 보호자 역할을 떠안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그 애가 가출을 했을 때도 그 시집에서는 우리 탓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었다. 느닷없이 서울에 있다는 순애의 전화를 받고 일하고 있는 식당으로 뛰어가 보니 시커멓고 마른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꾸중을 하려는 나를 붙들고 꿈을 꾸는 듯 말했다. 자기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우리 집에서 살던 때라고 했다. 지금도 그때를 그리워하며 생각을 많이 한 날은 그 시절 꿈을 꾼다고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던 일이나 월급을 타서 제 손으로 돈을 만져보고 모으던 이야기를 했다. 결혼할 때 내가 마련해준 혼수품 중에서도 예쁜 반짇고리는 아까워서 쓰지를 못하고 그때의 사진이나 악세서리를 모아두는 용도로 보관한다고 한다.내가 아직도 세 아이의 엄마이며 사십이 넘은 순애를 아이로만 착각하는 것도 그렇게 순수하고 천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내가 유달리 정을 쏟아 곰살굿게 대해 준 것도 아닌데 순애가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것은 어쩌면 처음으로 자기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인간다운 대접을 해준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고뭉치에다가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하는 시어머니의 구박이 힘든 농사일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는 순애의 말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파온다.

 

 우리 집에 데리고 있을 때 한글이라도 가르쳐서 까막눈이라도 면하게 해주었으면 조금은 덜 힘들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보며 아프게 번져온다.

 

                                                                                                                                               199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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