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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마음으로 하는말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3.

마음으로 하는 말

한 향순

 

  그날은 집에 손님들을 초대한 날이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메모까지 해가며 찬거리를 사왔는데도 일을 하다 보니 몇 가지 빠뜨린 것이 있었다. 약속시간은 가까워 오는데 혼자서 식사준비를 하다 말고 다시 시장에 가야 한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집에서 가까운 아파트 상가를 이용하기로 하고 차를 몰고 나갔는데 그곳에는 주차할 곳이 좁아서 몇 바퀴나 돌아도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모퉁이를 돌자 빈자리가 보이 길래 급한 마음에 얼른 주차를 시켰더니 그곳은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멘트로 장애물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갑자기 차의 밑 부분이 심하게 긁히는 소리를 내면서 장애물 위에 차가 얹힌 꼴이 되었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장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차를 빼내어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그곳 상가 경비원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밀어보기도 하고 들어보려고도 했지만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정비공장에 연락을 해 레커차를 부르려 했으나 전화번호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차의 앞뒤를 이리저리 살피는 것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왔다가 포기하고 간 뒤라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이 하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차를 이리저리 살피며 한참 무슨 궁리를 하는 것 같더니,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흰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트렁크에서 연장을 꺼내 차체를 올리기 시작했다.

 

  실은 구색만 갖추어 두었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연장이라 뻑뻑해서 그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가 되었다. 마침내 차가 위로 번쩍 들리자 그는 어디선가 보도블록을 날라다가 시멘트 장애물 옆으로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미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내가 도울 일은 없는지, 그렇게 하면 차가 빠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지만 그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마치 화난 사람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것이었다.

 

  한참 후 장애물 옆으로 보도블록이 엇비슷하게 된 다음에야 차체를 다시 내리고, 몇 번 실패를 한 후 드디어 차를 거기에서 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의 얼굴과 옷은 땀과 기름으로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그 표시를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수 없이 했지만 그 사람은 못들은 척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찬거리를 사려고 했던 잔돈푼 밖에 없기에 좀 부끄럽고 미안했지만 감사의 표시라며 얼마 안 되는 돈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 남자가 펄쩍뛰며 사양을 했는데, 그것은 말이 아니라 표정과 손짓으로였다. 그제야 나는 그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려운 처지를 도와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내가 아무리 물어도 말도 없이 일만 하던 그 사람의 태도가 조금은 거만하게 생각되었고, 혹시 나중에 엉뚱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그를 의심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에 찾아 뵐 터이니 연락처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는 나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펄쩍 뛰며 손짓으로 의사 표시를 했다. 자기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 전혀 부담을 갖지 말라며 홀연히 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인파 속으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울컥 눈물이 솟았다. “정말, 정말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속으로 수 없이 되 뇌이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비록 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내 감사의 말이 분명 그에게도 가슴으로 전달되었으리라 믿고 싶었다. 사람의 진심은 꼭 말로 표시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알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 않을까. 짧은 만남이었고 우리는 말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어도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서로 느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가 말을 하는 사람이었고 또 자기가 한 일에 공치사를 늘어놓았더라면, 나는 그 일을 이렇게 감동으로 오래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그 사람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것은 나도 누군가를 위해 친절을 베풀고, 또 내가 받은 것처럼 남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친절에 물질로 밖에는 보답할 줄 몰랐던 내 계산적인 행동이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199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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