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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장미와의 화해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4. 25.

장미와의 화해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으로 가는 거리에는 여러 가지 풍경이 있다. 흥겨운 음악과 춤의 축제가 있는가하면 묵묵히 앉아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도 있다. 가끔은 노천에 무대를 마련하고 연극을 하는 실험극도 볼 수 있다. 언제나 젊은이들이 마음껏 낭만을 즐기고 열정을 발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올해는 봄이 일찍 온 탓인지 온갖 꽃들이 앞 다투어 한꺼번에 피는듯하다. 개나리와 목련이 피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벚꽃과 진달래까지 만발하였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이 거리가 더 활기차고 눈이 부시도록 화사하다. 그러나 정작 병원 문을 들어서면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꽃과 나무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은 바깥 거리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걷기도 힘들어서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가는 사람이나 휠체어에 앉아 봄볕이라도 쏘이려고 시름없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환한 햇빛 속에서 갑자기 짙게 구름이 낀 그늘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목 디스크란 병을 얻어 여러 병원을 순례하기 시작한 것이 육년 전쯤부터이다. 처음에는 잠을 잘 수도 없을 만큼 너무 고통이 심해서 유명하다는 병원이나 한의원을 찾아서 헤매고 다녔다. 누가 무슨 약이 좋다고 하면 당장 가서 지어 오고, 용한 침술원이 있다면 의심 없이 달려가 뜸을 뜨고 침을 맞았다.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도 조금씩 줄어들고 빨리 병을 고치겠다는 성급한 마음도 다스리기 시작했다. 우선 사람에게 병이 나면 그렇게 되기까지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평소 생활 습관이나 자세가 나쁘다 던가 몸을 무리하게 혹사 시켰다 던지, 또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신경을 많이 썼을 것이다. 그렇게 무모했던 원인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조급한 마음에 안달만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다행이 남편의 권유로 이 병원 K박사님의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이 삼 년쯤 된다. 진료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자니 자연스럽게 다른 환자들에게 눈길이 간다. 맞은편에는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어디가 아픈지 휠체어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인 듯한 사람과 무어라고 소곤거리는데 웃음이 묻어나는 얼굴이 천진스럽기만 하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히 그 소녀를 보고 있다가 마치 오래된 환부가 다시 도지듯이 가슴에 통증이 왔다. 이십여 년 전 나도 이 병원에서 여섯 살짜리 아들과 한 달여 동안 지낸 적이 있다. 그때는 저 소녀의 엄마처럼 나도 아들의 휠체어를 밀며 병원 안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어느 날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아이가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눈을 다쳤다며 울고 들어왔다. 장난을 치다가 넘어지면서 친구 집 정원에 있는 장미가시에 눈을 살짝 스친 것 같았다. 처음 병원에서는 각막이 조금 긁혔으나 곧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나는 밤낮으로 아이를 업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치료를 받았건만 결국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이라는 이곳에 와서 들은 말은 믿기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장미의 독이 퍼져서 아이의 눈을 돌이킬 수 없도록 상하게 했단다. 그리고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이를 보면서도 혹시나 하는 미련 때문에 수술을 미루며 실성한 사람처럼 거닐던 복도, 수술을 하고 난 뒤 절망과 두려움에 떨며 밤을 새우던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아이는 제가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통증이 줄어들자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로 돌아왔다. 휠체어를 밀며 돌아다니던 회복기간이 끝나자 힘들었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한쪽 눈을 잃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 후 나는 오랫동안 외출을 피하고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집에서 칩거하듯이 살았다. 그때는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 잘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처럼 생각되던 젊은 시절이었다. 아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외면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병원에 있을 때는 고맙기만 하던 이웃들의 관심이 동정과 호기심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았고 아이와 같이 나의 인생까지도 패배하고 말았다는 절망감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장애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하고, 꿋꿋하고 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걱정하고 꺼려하는 것은 외면할수록 두려움이 커지는가 보다. 나는 오랫동안 아이의 상처와 관련된 것들을 모두 잊으려고 노력했고 피하려고만 했다. 간혹 이 병원에 병문안이나 문상을 올 일이 생겨도 이 근처에는 절대로 오지 않았고, 친구네 정원에 장미를 다 뽑아 버렸다는 말을 듣고도 밤새 가슴앓이를 했다. 정작 상처를 입은 아이보다 내가 더 흔들리고 휘청거렸다. 그렇게 절망의 늪 속을 허우적거리다가 나는 차츰 내 가정의 울타리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보다 더 절박하고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까지 나는 어리석게도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을 한 채 엄살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자 수치심이나 두려움은 없어지고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과 화해를 하게 되었다. 고마웠던 친구와 이웃들, 수술을 해서 한 쪽이라도 시력을 갖게 해준 이곳 대학병원과도... 그리고 그토록 저주하고 외면하던 장미꽃도 다시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모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혹시 내가 겪었던 아픔을 그들이 겪게 되더라도 오랫동안 절망하지는 말라고, 고통 뒤에는 반드시 기쁨도 함께 오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199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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