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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불씨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3.

불 씨

 

 

   오늘 아침이었다. 요즘 들어 자주 겪는 건망증 때문에 무엇을 찾느라고 집안을 뒤지다가 엉뚱한 장소에서 생소한 꾸러미를 찾게 되었다. 비닐봉지로 묶은 다음 여러 겹의 봉지로 포장을 했는데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문갑 깊숙이 보관한 것을 보니 중요한 물건 인 것 같아 가슴을 설레며 뜯어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그 곳에는 조그만 성냥갑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오래전, 분위기가 좋은 찻집이나 음식점에 가면 그 집을 다시 찾고 싶어서 성냥갑을 하나 둘 가져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숫자가 늘고 많이 모아졌다.

 

  그때는 내가 열심히 그것을 모으니까 담배도 안 피우는 남편이 가끔씩 예쁜 성냥들을 모아다가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것들을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니 추억속의 장소도 있고 더러는 아주 낯 설은 것도 있었다. 어느 여행지에서 묻어 온 것인지 생소한 지명이 적혀 있는 것도 있고, 아주 오래 전에 만든 것인지 모양이 변하고 퇴색한 것도 있었다.

 

  성냥갑을 모으던 시절에는 여행을 참 좋아했었다. 틈만 나면 지도와 관광 안내 책자를 뒤적이며 여행 계획을 세우고, 낯선 곳을 찾아 나서며 가슴을 설레 이곤 했다. 생소한 곳에서 접하는 자연의 풍광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매일 부딪혀야 하는 메마른 일상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방안 가득 성냥갑 보따리를 풀어놓고 회상에 젖어 있다가 이제는 쓸모가 없어져 버린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아파트 생활이라는 것이 일반 주택처럼 지하실이나 다락방이 있어서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관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선뜻 버리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짐을 꾸리던 기억이 났다.

 

  결혼해서 십 수 년을 단독주택에서만 살다가 처음 아파트로 이사를 오려니 정리해야만 할 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동안 살면서 손때 묻고 정이든 물건들을 버리고 가야 하는 현실에 우울해 있던 중이었다. 다락방을 정리하려고 짐을 드러내보니 까마득히 잊고 있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팔각정 모양에다 황을 부친 커다란 성냥 곽들과 뜯지도 않은 양초 갑들이었다. 이십 년 전 우리가 처음 집을 지었을 때,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이 선물로 사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어른들은 대대로 불씨를 소중하게 여기셨다. 옛날에는 불씨가 귀하기도 했지만 그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우리가 이사를 다닐 때에도 불을 꺼트리지 않게 불기가 있는 연탄 화덕을 이삿짐 트럭에 싣고 다니게 하셨다. 그때만 해도 연탄이나 석유곤로를 피워서 음식을 만들던 시절이어서 성냥은 요긴한 생필품이었다. 또한 전기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아서 갑자기 정전이 되면 촛불로 어둠을 밝히곤 했다. 그러나 필요성보다는 새로 이사하는 곳에서 모든 것이 불처럼 번성하고 잘되라는 의미로 사다주셨을 것이다.

 

   십여 년 전에도 이삿짐을 꾸리다가 성냥과 초를 찾아내고는 한참동안 난감해했다. 더구나 아파트 생활에서는 필요가 없어진 물건들을 가져갈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오랜 궁리 끝에 시골에는 아직 필요한 물건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께 도로 가져다 드렸다. 그 동안 어른들이 기원해 주신대로 식구도 늘고 돈도 모아 집을 늘려 가니 부모님도 오래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요즘은 홍보용 물건이나 집들이 선물도 시대에 따라 많이 변했나 보다. 얼마 전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아들의 방을 치우다가 라이터가 수북이 담긴 바구니를 보았다. 그 아이도 내가 성냥갑을 모으던 것처럼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인지, 그저 단순한 호기심으로 모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하잘 것 없는 물건들을 모으며 함께 했던 친구와 그 시절의 정취나 고뇌까지도 기억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을 아쉬워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떤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어 하나 둘 남기다보니 어느새 수북이 쌓이게 되었나보다.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그것들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새겨 본다. 점점 삭막해지고 메마른 나의 가슴에는 훈훈한 사랑의 불씨가 당겨져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고, 먼 곳에서 외로움과 공부와 씨름하고 있을 아이에게는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199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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