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모음/포토기행(길에서 길을 생각하며)

안개 숲속의 산수국

by 아네모네(한향순) 2016. 5. 22.

 

 

 

몽환의 안개 숲에서 만난 산수국

 

                                                                                                                                              한 향 순

 

6월의 제주는 대부분 음습하고 축축하다. 비가 자주 내리고 날씨가 변덕스럽다보니, 쨍한 햇빛을 보기도 힘들지만,

해가 나왔다가도 금방 먹구름이 몰려와서 언제 비를 뿌릴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일행은 습기에 약한 카메라를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기상조건은 나쁘지만,

맑을 때와 다른 모습을 만나기 위해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에는 보통 일 년에 한두 번쯤 오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어디를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제주에 사시는 H선생님의 안내로 제일 먼저 사려니 숲으로 향했다.

사려니의 뜻은 제주도 말로 신성한 혹은 신령스러운뜻이라고 한다.

 

사려니 숲은 천연림과 인공림이 어우러진 울창한 숲으로, 임도에 차량을 통제하고 탐방로를 조성하여 산책로로 재탄생시켰다.

숲길은 주로 삼나무 숲, 편백나무 숲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존 지역 내에 있다.

 사려니 숲길은 4개의 코스가 있는데, 물찻 오름에서 성판악 휴게소로 내려가는 코스와 붉은 오름을 돌아 내려가는 코스,

그리고 사려니 오름 방향으로 가다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 한남 쓰레기 매립장 옆에서 출발해

삼나무 전시림과 사려니 오름으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 등 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는데 숲속에 들어오니 어느덧 비는 안개로 변하여

숲속은 뽀얀 안개에 휩싸여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삼나무들이 도열하듯 서 있는데, 길 양옆으로 보랏빛 같기도 하고

 푸른색 같기도 한 꽃무리가 우리를 환영하듯 활짝 피어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에 탄성을 지르며 가만히 들여다보니 바로 산수국 꽃무리였다.

안개 속에 보석처럼 매달린 물방울들을 달고 파르스름하게 피어서 고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산수국은 작은 꽃들이 접시처럼 둥글게 모여 있으며, 가장자리에 아름답게 핀 꽃과 중앙에 자잘하게 모여 있는

꽃이 서로 모양도 기능도 다르다. 가장자리에 달린 꽃은 헛꽃이라 하며 화려한 꽃잎으로 곤충을 유인하는 역할을 하며,

수술과 암술은 퇴화하여 흔적만 남아 있다.

가운데에 있는 꽃은 참꽃이라 하며 가장자리에 있는 꽃이 유인해 온 벌과 나비들의 도움으로 꽃가루받이를 하므로

수술과 암술만 잘 발달되어 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비에 젖어 함초롬한 산수국의 삶이 눈물겨워 보인다.

자잘한 꽃 수백송이를 달고 있어도 하찮은 곤충조차 거들떠보지 않자, 종족 번식을 위해 잘디 잔 꽃송이

가장자리에 아름답고 화려한 헛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 것이다.

참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운 뒤에 헛꽃은 썩어가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는 꽃이다.

몇 년 전에 <산수국>이라는 책을 낸 수필가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수필가를 대신하여 가족들이 펴낸 유고집이었다.

 

제주의 산수국을 보자 그 수필집에 실렸던 그녀의 애잔한 글이 떠올랐다.

작고 볼품없는 진짜 꽃 주변을 빙 둘러서 피어있는 무성화는 유성화의 가루받이가 끝나면 몸을 돌려 꽃잎을 땅으로 향한다고 한다.

자기가 아닌 한 봉오리에 달려있는 다른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운 뒤에는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겨버리는 꽃.

헛꽃의 헌신은 대가없이 주는 모성과 같은 사랑이다.”라고 그녀는 산수국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 저런 사연을 들어서인지 몽환적인 안개 속에서 만난 산수국은 어쩐지 슬픔을 잔뜩 머금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모습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모습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안개비를 맞으며 촬영에 몰두하였다.

날씨가 궂어도 간혹 우산을 쓴 여행객들이나 연인들이 다정하게 숲속을 걷고 있었다.

 

 

이튿날도 비는 계속되었고 이날은 수국이 많이 피었다는 절물휴양림을 찾았다.

때 묻지 않은 원시 생명의 숲인 절물자연휴양림은 사람과 동식물이 함께 숨 쉬고 공존하는 삶의 터전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자연에 내려놓으며 치유를 받는 치유의 숲이라고 하는데,

자연치유의 핵심은 바로 피톤치드라고 한다. 피톤치드는 나무가 자라는 과정에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방향성 물질로, 살균과 살충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절물은 옛날에 절 옆에 물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약수암만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여러 가지 병을 낫게 하는 약수라고 한다.

휴양림에 오니 역시 쭉쭉 뻗은 삼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이 빼곡하게 심어져있고 양옆으로

수국과 산수국이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며 소담스레 피어있었다.

 

 

 

 

수국은 흰색으로 피기 시작한 꽃이 점차 시원한 청색이 되고 다시 분홍색으로 변하다가 나중엔 자주색으로도 변한다.

또 토양 조건에 따라 알칼리 성분이 강하면 분홍빛이 진해지고 산성이 강하면 남빛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수국은 조금만 건조해져도 바로 말라버리는 꽃이지만 습기를 워낙 좋아해서 물속에 담가 두면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살아난다. 영원히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변덕을 부리는 것이다. 장마철 같이

습도가 적합한 환경에서는 다른 어느 꽃보다도 오랜 시간 피어 있다. 그래서 수국의 꽃말이 '진심''변덕'인가 보다.

 

장마철인 이 계절에 제주를 찾으면 사려니 숲과 절물 휴양림 뿐 아니라 어느 곳에 가도 산수국과 소담스런 수국을 만나게 된다.

제주에 며칠 머무르는 사이 햇빛 구경은 못했지만 몽환적인 안개 속에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는

산수국 꽃무리를 조우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 온 길을 돌이켜 보게 된다. 나는 누구에게 산수국의 헛꽃 같은 사랑과 희생을 베풀어 본 적이 있는가?

또한 누구에게 그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격 월간지 여행작가 < 2016, 5, 6 월호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