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한 향 순
집에 들어오다가 우편함을 보니 책이 꽂혀 있었다. 책을 꺼내 발신인을 보니 뜻밖의 사람이라 급히 우편물을 뜯어보니
곱게 접은 손수건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한권, 그리고 요즘은 보기 힘든 손으로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자기의 요즘 소식과 근황, 그리고 내 책을 잘 읽고 있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왜 이렇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지금부터 서너 달 전쯤이었다. 올해 오월 중순쯤,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인연의 끈>이라는 제목으로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작품들을 세상에 내보인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작품발표를 하면서도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을 해줄지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다행이 여러 분들에게 호평을 들었고 전시기간 중에도 장소가 인사동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전시장을 찾아주시어 생각지도 못한 행복감을 누렸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맨 앞에 작가노트가 붙어 있는데, 손님들이 오시면 대부분 작가노트부터 읽고
작품을 관람하시도록 안내를 하였다. 그래야 작품을 이해하기도 쉽고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업을 하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작품 설명을 원하는 분들께는 상세하게 작품을 설명해 드렸다.
그녀도 그때 전시장을 다녀 간 관람객중의 하나였다.
작가노트에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인연 속에서 존재한다.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인연의 끈은 탯줄처럼 끈끈한 생명의 끈이다.
살아가면서 의지가 되고 보호막이 되어주는 소중한 인연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을 옥죄는 굴레처럼 벗어나고 싶거나 갈등을 겪을 때도 있고,
더러는 악연이 되어 시련을 겪을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인연이 꼬일 때도 있다.
불가에서는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으로 일체만물은 모두 상대적 의존관계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연은 하늘이 만들어주지만 이어가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모호하고 애매한 명제를 가슴에 품고 오랫동안 사진작업을 해왔다.
흔히 인연의 끈은 자르는게 아니라 푸는 것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삶의 매듭도 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애써 풀어야하는 것처럼 ...이런 의문들을 전시를 통해 함께 풀어보고 싶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전시작들은 대부분 ‘인연의 끈’을 여러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소재는 주로 바다에서 작업한 것들이 많았다.
그녀에게 감동을 준 작품도 풍랑이 많이 불던 날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튼실하게 묶어놓은 밧줄을 클로즈업 시킨 것으로
어떤 거친 풍랑에도 풀리지 않을 단단한 인연을 생각하며 작업한 것이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무심하게 전시를 관람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그 작품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전시가 끝나는 날 오후 늦게 젊은 여인이 헐레벌떡 전시장을 찾더니 느닷없이 작품 가격을 물었다.
반신반의 하며 가격을 알려주었더니 무조건 자기가 사겠노라며 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작품을 판 일은 있지만 이렇게 급하게 찾아와서 결정을 하는 일을 드물기에 의아해 했더니
사실은 며칠 전에 와서 꼼꼼하게 보고 갔다는 이야기를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주고 가버렸다.
전시장에서 작품철수를 하고 곧 배달을 시키려고 했으나 여의치가 않아 택배로 보낼까 생각하고 집으로 와버렸다.
그러나 이튿날 우체국에 가보니 작품이 너무 커서 택배가 안 된다고 했다.
작품료는 덜컥 받아놓고 고민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며칠 후, 내가 직접 서울로 찾아가 작품을 가져다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의 책을 대충 읽어보았다.
<아가 엄마>라는 제목의 그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로 아픈 엄마를 15년 동안 간호하며 쓴 병상일기였다.
그녀는 중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엄마와 단 둘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엄마가 아프고 엄마를 간호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열심히 병간호를 했으나 엄마는 결국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그녀의 극진한 효심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며칠 후, 그녀가 알려준 대로 서울의 북쪽 끝자락 동네로 찾아가 작품을 전달했다.
찻집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밝고 생기가 있어 보여 마음이 가벼웠다.
그때 나도 그녀의 책을 잘 봤다며 내 수필집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우리는 가끔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가져간 작품이 생각보다 커서 작은 집에 걸어놓을 데가 없어 베란다에 두고 본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쓰여 작게 다시 제작을 해서 가져다준다고 했더니 괜찮다는 내용들이었다.
아무튼 젊은 여인이 평생 의지하였던 엄마를 잃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측은하기도 하고 마음이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고 그런 일들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오늘 느닷없이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텃밭에 씨를 뿌려야한다는 말이 있다. 좋은 텃밭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글과 내 작품을 보며 그녀가 작은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찬 일이겠는가.
그녀와 나, 우리는 무슨 인연으로 만났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인연이 좋은 텃밭에서 곱게 자라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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