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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실종된 기억

by 아네모네(한향순) 2017. 9. 15.




실종된 기억

           

                                                                                                                                                                                 한 향 순

 

어머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은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어머니 여기가 어디예요?”라고 물으면 어느 때는 병원이지.” 라고

 정답을 말하다가도 금방 글쎄 여기가 어디지?”라며 모른다는 듯 머리를 흔드신다.

 올해 94세인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생활하시는데 별로 불편이 없으셨다.

건망증과 말수가 줄어들어 가끔 우울증세를 보이긴 하셨지만 치매증상은 없으셨다.


그런데 정초에 넘어지면서 고관절이 부러져 수술을 하시고 부터는 체력과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인지능력도 줄어들어 엉뚱한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다.

사람 얼굴도 오래 된 가족이나 식구들은 알아보는데 간병인이나 다른 사람들은 잘 구분을 못하셨다.

우리는 병원에 가면 우선 어머니 저 누구예요?”라고 물으며 어머니의 인지능력부터 시험하곤 했다.


 입원기간이 차차 늘어나면서 병원을 옮기기도 하고 병실도 여기저기 옮기다보니 어머니는 불안증 때문인지 치매증상이 심해지셨다.

잠을 못자는 날에는 엉뚱한 행동을 벌이기도 하여 간병인이 애를 먹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머니가 더 나빠지지 않는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어머니의 남아있는 기억을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손자나 손녀는 알아보시지만 어느 때는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도 잘 기억을 못하셨다.

치매의 증상이 오래 된 기억들은 머리에 지니고 있는데, 최근에 일어난 일은 잘 기억을 못하는 것이라 하여

이해는 하지만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기는 우리도 정신이 깜박 깜빡하여 사람 이름이 머릿속에서 맴돌거나 금방 손에 쥐고 있던 것도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애를 태울 때가 많다.

어떤 친구는 그런 건망증 증세가 너무 심해지자 덜컥 겁이 나 병원에 가서 인지능력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검사결과가 나쁘면 치매초기로 인정하고 치매 치료제를 처방해 주는데, 다행이 그 정도는 아니어서 조심하고

생활습관을 바꾸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의 노년을 위협하는 질병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생명을 단축시키는 암이나 심장병도 무섭지만,

환자의 가족이나 반려자를 괴롭히는 치매는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렇다고 누군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병마를 피할 수는 없다. 그저 우리에게만은 그런 불행이 피해가기를 바랄뿐이다.


지난 봄, 인사동에서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사진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친구와 지인들이 전시소식을 듣고 많이 찾아와서 축하를 해주셨다.

그 언니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시장을 찾아와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만에 뵈니 얼굴이 조금 수척해졌을 뿐, 시원스런 입담과 유머감각은 여전했다.

그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십 여 년 전쯤, 친구의 한국무용연구소에서였다. 그곳의 원장이던 친구의 권유로 한국무용을

시작하고 한참 재미가 붙어 연구소에 자주 들락거릴 때, 그 언니도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지만 춤 솜씨나 생각은 나보다도 훨씬 진취적이고 월등한 분이었다.

한때 미국에서 살아서였을까 영어도 유창하고 활동적이어서 취미도 다양하고 생각도 젊은 인텔리였다.


우리는 비슷한 또래들과 무용수업이 끝나면 밥도 같이 먹고 공연도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레 친해졌다.

그러면서 몇 년 동안 놀러 다니기도 하고 여행도 같이 다니면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무리를 한 탓인지 어느 날 덜컥 무릎이 고장 나서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되자 실의에 빠지게 되고 무용연구소와 점점 거리가 생겨 소식을 끊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언니와도 소원해졌고 오늘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같이 동행한 친구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요즘 언니가 가끔 치매증상을 보이셔서 걱정이라고 귀 뜸을 해주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언니는 그럴 리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하면서도 놀란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전시가 끝나고 얼마 후, 그 언니의 일이 마음에 걸려 한번 찾아보기로 하고 전화를 했다.

다행이 몇 달 전에 우리 집 근처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어서 주소를 물었더니 한참 후에야 문자가 왔다.

그러나 주소에는 아파트 이름이 빠져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집에 찾아가려고 하는데 아파트 이름을 물었더니

그냥 보내준 주소대로 내비게이션을 치면 된다고 말끝을 흐렸다.


언니에게 줄 화사한 액자를 포장해서 차에 싣고 그 동네로 향했지만 도저히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의 통화 끝에 다행이도 언니를 만나 내 마음의 선물을 전달해주었지만 아파트 이름을 잊어버린

언니를 보며 놀란 가슴은 집에 와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살다보면 누구나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험한 복병을 만나 힘들어하고 투병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이 서서히 지워지는 치매는 정말 가족이나 주위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정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사람과 공유한 시간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가슴 깊숙이 묻어둔 기억의 창고에 쌓이는 것이 아닐까.

그 창고를 한꺼번에 도둑맞지 않게 잘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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