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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추억을 돌려드립니다.

by 아네모네(한향순) 2017. 3. 26.




추억을 돌려드립니다.

 

                                                                                         한 향 순

 

전철 안에서 잠깐 졸았나 보다. 몽롱한 분위기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얀 설원에서 어떤 남녀가 재미있게 눈싸움을 하는 장면이 보이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것이 무슨 상황일까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여 본다. 오래전 인상 깊게 보았던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의 주제음악이 복잡한 전철 안을 장악하듯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요즘도 이렇게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혼자 상념에 빠져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데, 이번에는 귀에 익은 다른 곡이 복잡한 인파사이로 들려왔다.

요즘은 거의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혼자 듣는 것이 대세인데 도대체 누가

음악을 이리도 크게 트는지 궁금했다. 음악이 멎자 사람들 사이를 뚫고 어떤 사내가 나타났는데,

알고 보니 전철 안에서 CD를 팔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흔히 보아오던 지하철 상인들처럼 원가도 안 되는 가격에 CD 몇 장이 든 한 세트를

만원에 팔고 있다는 설명을 하며 물건을 들고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승객들은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모르는 척 외면을 했다.

사내는 아직도 몽롱하게 앉아있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나에게 CD를 내밀며 사라는 시늉을 했다.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이지만 나는 잠시 갈등에 휘말렸다.


요즘 CD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괜히 집에 가져가서 애물단지 취급이나

받다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닐까.

식구들에게 괜한 짓을 했다고 핀잔을 듣지는 않을까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에잇 그래봐야 만 원인데하며 백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사내에게 주었다.

그는 들고 있던 것을 얼른 내밀며 잘 사셨어요. 오늘 밤 행복하실 겁니다. 제가 추억을 돌려드리니까요.”라며

조금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음 칸으로 떠났다.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것을 의식하며 황망히 시치미를 떼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핸드백에 구겨 넣었다.

집에 오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CD를 집에 가져가도 재생하여 들을 CD플레이어가 없는 것이었다.

 부피가 큰 앰프나 음향기기는 몇 년 전, 이사 올 때 모두 처분했고 작은 것들도 고장이 나서 버린 것 같았다.

컴퓨터에도 요즘은 CD플레이어가 없이 다른 저장장치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아니 이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잠시 추억에 젖어 감미로운 기분을 다시 맛보려다가

치매에 걸린 노인네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

 바로 차에 붙어있는 CD플레이어이다. 요즘 새로 나온 신형 차에는 그런 구닥다리 기기가 없지만

연식이 오래된 우리 차에는 아직 CD플레이어가 그대로 남아있다.


젊은 시절에는 운전을 하며 음악을 참 많이도 들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내 감정에 취해서 드라이브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운전을 해도 그저 라디오나 가끔 틀었지 CD를 켜본지가 꽤 오래된 듯하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올랐다.

그리고 시동을 켠 다음 CD의 포장을 뜯고 하나를 꺼내 가만히 밀어 넣었다.

갑자기 폭포수가 쏟아지듯 차안이 감미로운 음향으로 가득 찼다. <러브 스토리>뿐 아니라

영화<로미오와 줄리엣>의 테마 음악 <닥터 지바고>의 주제곡 들이 좁은 공간 안에 흘러넘치면서

나는 잠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저런 영화들을 볼 때는 감성이 충만하던 젊은 시절이어서 영화를 보고 난 후, 감동과 여운이 오래 지속되곤 했다.

더불어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듯이 그 영화를 함께 보던 친구들 얼굴이 한 둘씩 떠올랐다.

지금까지 교류를 하고 있는 친구도 있지만 소식이 끊어지고 잊고 있던 친구도 있었다.

전철 안의 상인이 말한 것처럼 일금 만원을 주고 정말 추억을 돌려받은 기분이어서 모처럼

감미로운 행복감을 즐길 수 있었다.

지난달에 일본의 교토여행을 했다.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만큼 옛것이 고스란히 보전되어있는 도시이다.

교토에서도 특히 기온(祇園)거리는 교토의 옛 분위기를 만끽 할 수 있는 곳이다.

기온거리 중에 시조도리에서 하나미코지까지의 길로 들어서면 백년이 넘는 목조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골목이 나온다.

오랜 세월을 지켜 온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마치 내가 그리던 고향 동네에 와있는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인천의 고향동네도 분위기가 그곳과 비슷했다.

일본 적산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으며 다다미를 깐

이층 방에서 추위에 떨며 책을 보곤 했다. 예상치도 못한 남의 나라에서 내가 자라던 고향집의 향수를 느끼고

대책도 없이 추억에 빠져들었다.

옛 생각에 몰입하여 뜬금없이 눈물을 보이다가 동행들에게 어이없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추억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내가 살아 온 삶의 역사이자 나를 돌아보는 일이다.

어릴 적 생각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것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2017년 봄호 <계간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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