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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by 아네모네(한향순) 2016. 12. 21.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한 향 순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성난 바다의 모습이 TV화면을 가득 채운다.

 파도가 방파제를 뛰어넘어 차도를 덮치는 모습과, 격랑 속에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모습은 먹이를 앞에 놓고 으르렁 거리는 짐승을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바다와는 너무도 다르다.

사람들은 대개 힘들거나 답답한 마음이 들 때는 바다를 떠올린다.

넓고 푸른 바다를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후련해 질 것 같은 심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독 어려서부터 바다를 싫어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싫어하기 보다는 두려워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어느 해 여름 가족들과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일이 있었다.

물이 허리에 찰 정도로 수심이 깊지 않은 바다에서 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수영하시는 것을 보며 쫓아가다보니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얼마동안 물을 먹고 있었는데, 간신히 어떤 고마운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 날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바다보다는 산이 좋았고, 누가 산과 바다 중에 어느 곳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서슴없이 산을 좋아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주위에 유난히도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바다를 보고 자라서인지 조금 마음이 울적해도 바다에 가고 싶어 했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꼭 바다를 찾곤 했다. 그 친구가 바다에 가자고 하면 나는 산을 가자고 했고,

서로 다른 우리는 상대방의 취향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사주팔자가 달라서 일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내 사주에는 나무 목()

나무가 있는 산에 자주 가야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무릎이 부실해지자 등산을 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좋아하던 산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주말만 되면 어느 산에 갈까

 하고 전국명산을 찾아 누비던 내가 이제는 누가 산에 가자고 할까봐 겁이 날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호주에 살고 있는 아들이 일 때문에 잠깐 다니러 들어왔는데, 우리는 바쁜 틈을 내어

며칠이라도 가족 여행을 하기로 하고 설악산에 갔다.


가족은 오랜만에 설악산에 왔으니 산의 문턱이라도 올라야 되지 않느냐며 흔들바위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젊은 시절 산을 타던 때에는 흔들바위는 설악산의 초입이었다. 그런데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을 올라가도

 흔들바위가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바위가 어디로 사라진 것도 아닐 텐데 왜 안 보일까 조바심을 치는데

다 오셨습니다. 조금만 올라가시면 됩니다.”라고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이 일러준다.

그제야 멀리 커다란 바위가 보였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산을 오르니 겨우 흔들바위를 오르는데도 힘이 들었다.


사람도 자주 만나야 가까워지듯이 요즘에는 변심한 연인처럼 산보다는 그렇게 멀리하던 바다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취미로 사진촬영을 하고부터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바다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감싸고 있는 새벽의 바다나,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여명의 바다에도 많이 갔었고.

고깃배가 들어오고 삶의 활력이 넘치는 아침의 포구도 사람냄새가 나서 좋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두려운 존재의 바다가 좋아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린 왕자도 사막에 떨어져서 장미꽃과 친구가 되기까지는 서로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듯이

나에게도 바다와의 화해의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동안 사진을 배우던 선생님이 바다를 너무 좋아해서 우리를 자주 바다로 이끌고 다녔다.

얼마 전에 사진 친구들과 몇 년 동안 촬영한 바다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거기에는 여러 모습의 바다가 들어 있었다. 오늘 TV에서 본 성난 바다도 있고,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도 있었다.


나는 작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바다는 많은 것을 포용하고 정화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이 들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바다를 찾는다.

 모나고 상처 난 마음을 바다에 풀어놓기 위해서이다. 숱한 사람들의

각진 마음까지 품어주는 포용의 바다. 이제 바다는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다.

 저마다 바다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우리는 포용의 바다가 될 것이다.”


살다보니 내가 산과 바다를 생각한 것처럼 어떤 것을 영원히 좋아 할 수도,

 또한 싫다고 외면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계기로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 멀어질 수도 있고 아주 싫어하던 것이 호감으로 다가오기도 하니 말이다



                                                                                  2016년 겨울호 <에세이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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