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호 < 그린에세이 >
병원에서
한 향 순
주위가 소란스러워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살그머니 병실을 빠져나와 운동 삼아 병원 안을 걷기로 했다.
처음에는 입원실이 있는 6층 복도를 걷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외래 병동으로 내려왔다.
평소에는 사람들로 붐비던 대기실이 텅 비어 썰렁했다. 종합병원의 대기실은 늘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물론 아픈 사람들도 있지만 환자를 모시고 온 자녀들이나 보호자들로 빈자리가 없던 곳이었다.
근심을 끌어안고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텅 빈 의자에 앉아보았다.
종합병원에 오는 이들 중 대부분은 지역병원에서 해결 할 수 없는 큰 병을 앓는 사람들이어선지 모두 표정이 어둡다.
다행이 내가 있는 정형외과 병동은 좀 덜 하지만 초록색 아치를 지나 암 병동으로 가는 길목을 지나다보면 더욱 무거운 분위기다.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라도 잡으려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기에 그쪽으로 향하는 내 발길도 무거워진다.
두어 해전부터 팔이 간간히 아파오더니 근래에는 점점 심해져서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정밀 검사를 하였더니 어깨에 있는 회전근개 파열이라는 병명이 나오고, 수술 외에는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여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앓는 병이고 수술만 잘하면 낫는다고 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막상 수술을 하고보니 통증도 만만치 않은데다 꼬박 두 달 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보조대를
차고 있어야 하는 등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른 팔을 못 쓰니 운전은 물론 젓가락질이나 옷을 갈아입는 등 아주 사소한 행위마저도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쪽 팔을 쓰지 못할 뿐, 두 다리는 멀쩡하니 간병인을 쓰지 않고 낮에만 가족들이 와서 돌보아주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돌아간 밤 시간에는 혼자 책을 보거나 이렇게 병실을 빠져나와 병원 구석구석을 돌며 걷기운동을 한다.
그러다보면 낮에는 보지 못하던 모습들이 보이기도 하고 미처 느끼지 못하던 아픔들이 눈에 띠기도 한다.
오늘도 암 병동을 돌아 나오려는데 사람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텅 빈 대기실에서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여인의 가느다란 울음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무슨 괴로움이 있기에 잠들지 못하고 대기실에 내려와 숨죽이며 울고 있는지 측은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알은체를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올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묻고 가느다랗게 흐느끼는 어깨에서 막내 동생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병원에서 막내 동생도 저렇게 울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보다도 열세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식이 들린 건 몇 달 전이었다.
평소에 밥을 잘 안 먹고 야위어가던 제부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이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었다.
서둘러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동생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갑자기 초췌해진 동생을 보며 “밥 잘 먹고 너라도 힘을 내야 된다.”고 의례적인 말 밖에 할 수 없었지만,
혼자서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생각하면 안쓰럽고 미안할 뿐이다. 특히 부모형제나 가족들이 아플 때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도 대신 해줄 수 없고 도와 줄 수 없는 현실이 그저 막막할 뿐이다. 요즘 동생은 모든 것을 전폐하고 제부의 병간호에 전력을 쏟고 있다.
그러나 제부의 상태는 별로 호전되지 않고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한 소식뿐이다.
고통을 참고 하루하루를 넘기며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 또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병원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지 감히 짐작도 못할 일이다.
그래서인지 병원에는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여러 분야의 봉사자들이 많이 있다.
물론 대가를 받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간병인들도 고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부디 그들의 고마운 손길이 아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길 바랄뿐이다.
한 시간 가까이 병원 안을 걷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몇 년 전에 읽었던 법정스님의 ‘보왕삼매론’의 글귀가 생각났다.
"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러므로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는 부처님 말씀이다.
병고가 죽을병이 아니라면 그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고 양약을 삼으라는 말 일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간교한 동물이어서 아플 때는 마음이 약해져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낫기만을 바라지만,
막상 건강해지면 까맣게 잊게 되는 인간의 특성을 꼬집어서 말씀하신 것 같다. 내일이면 병원생활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며칠간의 병원생활이었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외출이 되었기를 바랄뿐이다.
(읽기 쉽게 하기 위해 문단을 임의로 잘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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