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에세이 문학>
탑돌이를 돌아보며
한 향 순
한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우연하게도 깊은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불교신도도 아니고 절에 볼일도 없는 나그네가 그냥 조용한 분위기에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 지인을 따라 온 것이다.
오대산 자락에 있는 월정사에서는 새해맞이 행사로 ‘삼보일배’가 있었는데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스님들과 몇 십 명의 불자들은
일주문에서 대웅전 앞마당까지 눈밭 위에 엎드려 절을 하며 몇 시간동안 행진을 하였다.
‘삼보일배’란 불교에서 행하는 기도로 세 번 걷고 한번 엎드려 절하는 의식이다.
신도들 중에는 청소년이나 어린 학생도 있고 걸음도 옮기기 힘들어 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간구하며 그 어려운 행군을 하였을까. 몸은 힘들고 고되어도 기도를 마친 그들의 표정에는
드디어 해내고 말았다는 기쁨과 감사의 표정들이 넘쳐흘렀다.
조금씩 어둠이 깃들자 산사는 적요 속에 잠겼다. 법당 쪽에서는 기도도 드리고 연등을 만드느라 분주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방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는 절해고도 같았다.
TV도 없고 다른 소품도 없는 텅 빈 방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원한 밤바람이라도 쏘이려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별들이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알싸한 밤바람이 귀와 얼굴을 할퀴며 지나가도 새해 새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추위마저 잊게 만든다.
한해가 가고 새날이 온다고 갑자기 달라질 일도, 애타게 기다릴 이유도 없건만
사람들은 왜 굳이 한 해의 경계를 만들고 새해의 의식을 치르는 것일까.
아마도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새로운 약속이나 다짐을 할 명분을 주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속에서 월정사라는 사찰의 이름과 걸맞게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은가루처럼 탑 위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오대산 월정사는 고려시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인데 여러 가지 국보급 보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적광전 앞마당에 서있는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48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탑이다.
탑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석조보살좌상이 다정한 미소로 탑을 바라보고 있다.
고즈넉한 밤에 달빛을 받으며 탑 주위를 서성거리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오더니 손수 만든 연등에 불을 켜고 탑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염불을 외우며 탑을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을 염원하며 한 해의 마지막 날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도를 드리는 걸까.
자정이 가까워오자 마음이 숙연해지며 나도 모르게 그들 속에 섞여 드는 것 같았다.
지나 온 한해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올해는 기쁘고 벅찼던 일과
힘들고 아팠던 일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내 삶을 관통한 한 해였다.
지난 오월에는 그동안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던 사진에 대한 결실로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많은 지인들이 찾아주시고 성원해 주시어 한껏 기쁨과 행복감을 누리던 달이었다.
더구나 그 핑계로 외국에 멀리 있는 아들이 찾아와서 모처럼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을 누렸다.
그러나 겨울에는 오랫동안 아팠던 어깨를 회전근개 파열이라는 병명으로 수술을 받았다.
다 아는 병이고 위험한 수술도 아니었지만 수술 후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고, 두 달여 오른팔을 쓰지 못하고
보조대를 차고 있어야하는 기간이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오른팔 하나를 못 쓰는 것이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고 그렇게 치명적인 장애가 될 줄은 몰랐다.
왼팔 하나로는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밥을 먹을 때 젓가락질은 물론 포크도 사용하기 힘들었다.
아무튼 간단한 일상생활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하니 겪어보지 않고는 그 황당함을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더구나 세모가 가까워오자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자신에게는 고달프지만 남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감사하게 여기고 힘든 그 일에 참여해야 하는지
또는 삶의 황혼녘에 사람과 일로 복잡하게 얽히는 것이 싫어 그 길을 외면해야 하는지
내 인생의 기로에서 심한 갈등에 휘말렸다.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후회 없는 길이 될지 아득하기만 했다.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끝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웠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두려움과 망설임만으로 피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도 짧지 않은가.
부딪혀서 상처도 나고 힘들어서 코피가 난다고 해도 한번 도전하여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모든 길은 내안에 있고, 내 마음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어느덧 탑돌이 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돌아가고 곧 올해도 저물고 희망찬 새해 새날이 밝아올 것이다.
( 20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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