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의 위로
한 향 순
낯선 도시에 내리자 사방천지가 눈이 온 것처럼 온통 하얀 색깔이다.
그곳에는 때마침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여행객들을 반겨주었다.
떠날 때는 거리도 황량하고 추위도 그대로여서 벚꽃은 생각지도 못하고 나선 일본여행이었다.
그러다가 꽃을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큰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올해 초, 가족 중에 두 사람이나 한 달 사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저세상으로 떠났다.
한 사람은 바로 밑에 남동생으로 오랜 지병으로 고생은 했으나 전날 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튿날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또한 여동생의 남편인 제부는 넉 달 전, 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하고 투병을 하는 중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한창 세상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 떠나고 나니 허망함과 함께 맥이 풀렸다.
그러나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죽음의 길에서 제일 고통스럽고 힘든 사람은
동기보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일 것이다.
나는 손윗사람으로 올케와 동생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주는 49재 까지 지내고 허탈감에 빠져있는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가까운 일본 여행을 준비했다.
다행이 올케와 동생이 순순히 따라주어 셋이 일본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남이 보면 화기애애한 자매들끼리의 즐거운 친목여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언제 어느 때 그들의 누선을 건드려 슬픔의 봇물이 터질지 몰라 그저 조마조마 하기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에겐 초행길인 일본에 벚꽃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좋은 느낌을 주었는지
여행하는 동안 밝은 표정들이어서 조금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말 수가 적고 무뚝뚝하시던 아버지는 벚꽃을 무척 좋아하셨다.
창경원에 벚꽃이 피고 벚꽃놀이가 시작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를 데리고 꽃놀이를 가셨다.
어머니는 툴툴거리면서도 부산스럽게 김밥을 싸고 음식을 준비하여 우리는 소풍을 갔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자칫하면 아이들을 잃어버릴 뻔 했어도 그 행사는 몇 년을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커지면서는 막내만 데리고 가셨지만 아버지께는 그것이 유일한 낭만이자 사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추억이 오래 남아서인지 젊은 시절에는 벚꽃이 피는 시기가 돌아오면
왠지 꼭 벚꽃놀이를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창경원에서 하는 밤 벚꽃놀이라도 가자고 해마다 남편을 무던히도 졸랐던 기억이 난다.
색색의 조명등 아래 붉게 물든 벚꽃을 바라보며 노를 젓는 보트라도 타게 되면 낭만의 극치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벚꽃을 거리에 가로수로도 심고 아파트 안에도 많이 심어 가만히 앉아서도 꽃구경을 할 수가 있다.
먼저 간 남동생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말이 없고 무뚝뚝한 편이었다.
그래도 책임감이 강하고 속정이 많아 장남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고,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며 집안행사를 거르지 않았다.
물론 그 뒤에는 올케의 헌신이 가장 컸지만, 그런 동생이 한없이 고마웠다.
남동생이 당뇨 합병증으로 투석을 받고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을 때,
무엇보다 올케의 헌신적인 간호와 보살핌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올케는 넉넉지 않은 집안에 맏며느리로 들어와 말없이 힘든 역할을 묵묵히 해내었다.
모시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조금 편해질까 했는데 남편이 병을 얻은 것이다.
올케는 병간호가 천직이었던 사람처럼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보살폈다.
집에서 복막투석을 할 때는 간호사처럼 하루에 몇 번씩이나 기계를 돌려 투석을 시키곤 했다.
올케의 지극한 간호가 아니었다면 동생은 아마도 더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 올케가 이제 모든 짐을 벗고 편하게 노후를 즐기면 될 터인데 막상 긴장이 풀리니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아서인지 허물없이 친구 같은 자매라기보다는 맏언니를 어려워했다.
그리고 제부의 건강이 그 지경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해 자책으로 자신을 학대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반려자를 잃은 슬픔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하는지 몰랐다.
그런 동생을 보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세먼지에 시달리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의 봄날은 시샘이 날만큼 쾌청하고 상큼했다.
거기에 가는 곳마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환호성을 지르게 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많이 걷고 많이 웃었다.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동생들도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는 듯 했다.
“그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도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차츰 옅어지고 그 속에서 다시 희망을 발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일 것이다.
이번 여행길에서 만개한 벚꽃을 보고 동생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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