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열쇠는 나에게 있었다.
한 향 순
햇볕이 따스하고 나른한 오후였다. 소파에 앉은 채로 잠깐 졸았나보다 무심히 켜놓은 TV소리마저 가물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에 지고나면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밤을 생각하고 벌떡 일어났다.
졸음을 쫓기 위해서라도 어디든 나가야 했다. 어디를 갈까 망설이는데 어제 누가 빅 세일을 한다던 아울렛이 생각났다.
‘그래 운동할 때 입을 티셔츠라도 살 겸 그곳에 가볼까.’라는 생각이 들자 마치 급한 용무가 생긴 사람처럼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마침 휴일이어선지 아울렛 가는 길은 초입부터 막혔다.
빅 세일을 한다더니 무슨 횡재인가 싶어 모두 나 같은 마음으로 그곳을 향하는가 싶었다.
30분쯤 지루하게 기다려도 늘어선 차는 별로 줄어들지 않고 마음은 급해졌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하는데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기는 아깝고 어떡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기다리는 차들 사이로 갓길에 길게 늘어선 주차 행렬이 보였다.
평상시에는 전혀 주차를 할 수 없는 대로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수십 대의 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휴일이라 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 무단주차를 한 것 같았다.
한 두 대도 아니고 저 많은 차를 어떻게 단속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며,
나도 그곳에 주차를 하고 싶은 유혹이 머리를 들었다.
마침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하듯 앞쪽의 차 한 대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빈 공간이 생기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에 주차를 하고 급하게 아울렛으로 향했다.
예상한대로 쇼핑몰은 밖에까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상인들의 외치는 소리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뒤범벅이 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빼고 진열대를 기웃거렸으나 도무지 물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의 열기 때문에 등 뒤로 땀이 줄줄 흘렀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무언가 사기는 사야겠는데 얼른 눈에 띠는 것이 없었다.
떠밀리다시피 이삼층을 오가며 겨우 만 원짜리 티셔츠 두 장을 손에 쥐고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당연히 주머니에 있어야할 자동차 열쇠를 더듬어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분명히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
꼼꼼히 기억을 되돌려보니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더워서 재킷을 벗어 들고 다녔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티셔츠를 입어보기 위해서 잠시 벗었던 일도 생각났다.
아마도 그때 주머니를 벗어나 어느 곳에 떨어졌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내 자동차 열쇠는 스마트키로 명함 크기에 사각모양인데다 큼지막한 액세서리도 달려있으니
얼른 눈에 뜨여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빗나간 예상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여를 흔적을 따라 쇼핑몰을 샅샅이 뒤졌으나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객센터에 분실신고를 하자, 누군가 주워서 가지고 올 테니 걱정 말고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길가에 무단주차를 한 차를 두고 어떻게 맘 편하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무단주차를 했던 그 많은 차들은 모두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내차만 대로에 뻔뻔하게 서 있었다.
보험회사에 연락을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는 견인도 할 수 없다는 대답이고, 열쇠기술자를 부르라고 하였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열쇠기술자는 휴일인데다 가는 길이 막히니 가격은 어떻든 간에 언제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맥이 풀려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오후 내내 쇼핑몰을 오르내리며 열쇠를 찾느라 진땀을 흘리고,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어
집에다 연락도 못하고 긴장을 한 탓인가 보았다.
캄캄해진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도 처량했다.
오늘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을 되돌려보았다. 낮잠을 피하려고 집을 나선 것부터 잘못이었다.
아니 그 이전, 딱히 살 것도 없는데 빅 세일을 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흔들렸었다.
그리고 차가 밀려 기다리기가 지루하다고 무단주차를 한 것도 얕은 수법이었다.
더구나 군중심리에 이끌려 꼭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사려고 쇼핑몰을 휩쓸고 다니지 않았던가.
또한 당연히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속단하고 미리 미리 대처 방법을 찾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날씨는 추워지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무엇보다 낯선 차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보니 나중에는 자동차 불빛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뒤늦게 가족들이 놀라서 달려오고 내 대신 밤늦게 열쇠를 새로 만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티셔츠 값의 스무 배가 넘는 대가를 치르고 몸살을 앓았다.
언제든지 모든 문제의 열쇠는 내안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잠시 그러한 이치를 망각하고 어리석은 판단으로 하루 종일 애태우며 고생을 한 하루였다.
(읽는 분의 시각적인 편의를 위해 문단을 임의로 바꿨습니다.)
< 계간수필 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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