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처하는 법
한 향 순
사진 속의 동생의 얼굴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꼭 일 년 전이었다.
매년 절에서 지내는 어머니 제사를 마치고 남동생 집을 찾았다.
오랜 지병으로 바깥출입을 못하는 동생을 평상시처럼 위로하고 얼굴이라도 보고 오기 위해서였다.
그는 거동은 불편해도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반가워하였다.
우리가 다녀 간 다음 날, 남동생은 점심까지 잘 먹고 들어가 누웠는데 그 모습이 이승에서 마지막이었다.
오늘 꼭 일 년 만에 첫 제사를 지내는데 우연히 제삿날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은 날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못하지만 어쩌면 제 처를 배려한 우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십년 가까이 아픈 남동생을 극진하게 보살핀 올케의 간호는 정말 헌신적이었다.
동생은 당뇨합병증으로 집에서 복막투석을 하루에 몇 번씩 하고, 수술로 발가락을 잘라내도 자꾸 화농이 되어 말썽을 일으켰다.
그런 남편을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십년 동안 보살핀 아내는 병간호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사람 같았다.
이제 천형(天刑) 같은 의무에서 놓여나 노후의 생을 즐기고 살아야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귀에 이명이 생기고 몸의 여기저기가 고장 나서 병원에 다닐 일 밖에 없다고 한다.
얼마나 황당하고 슬픈 소식인지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미어져왔다.
망자에게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푸석해진 감성처럼 눈물도 말라버린 것 같은 요즘, 딱히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가슴 속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와 나도 모르게 울컥한 것이다.
아직은 살만한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등진 동생의 한평생이 너무 가엽고,
혼자 남겨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올케의 처지가 안타까워서였을까.
아니면 모두 제 설움에 운다고 가슴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내 고통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넘기 힘든 몇 번의 고통을 만날 것이다.
누군가 그 고통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 고통을 이해하며,
고통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저 견뎌내야 한다고 했다.
삶의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고통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잃게 만든다. ‘
왜 나에게만 하필 이런 고통이 왔을까.’라는 의문에서부터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신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라는 자조(自嘲)와 함께 누군가를 원망까지 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일진대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고통은 올 수 있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고난이 요행처럼 나만 피해가고 나에게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언제 어느 때 나를 덮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뎌내는 일 밖에 없지 않은가.
고통의 의미는 고통을 이해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은 지금 순간을 경험하는 자기와, 훗날 그 경험을 기억하고 재해석하는 자기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 때는 훗날 이 고통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에게도 젊은 시절,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오랫동안 힘들어 한 적이 있었다.
세상을 원망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과 화해하게 되었고 차츰 고통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글을 쓰는 작업은 자신의 발가벗은 속내를 들여다보게 하고 좀 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즈음 나는 누군가에게 내 고통을 알아달라고 엄살을 피우며 시위를 한 것이었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통을 겪었거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상에는 내 고통보다 훨씬 큰 짐을 지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 주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거나 반려자를 잃고 홀로 되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그들에게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 할 때가 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섣불리 무슨 말로 위로를 해준단 말인가.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의 뜻을 상기시키며 참고 기다리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남동생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처럼 형제들인 모인 이 자리에도 혼자 된 동생이 둘이나 있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야하는 그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또 막막해진다.
고통에 대처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2019년 <에세이21> 봄호
'나의 글모음 > 수필집 ( 인연의 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 (0) | 2019.06.28 |
---|---|
현충원의 봄 (0) | 2019.06.17 |
포기도 미덕이다. (0) | 2019.03.10 |
문제의 열쇠는 나에게 있었다. (0) | 2018.12.10 |
유월의 솔숲에서 (0) | 2018.07.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