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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

by 아네모네(한향순) 2019. 6. 28.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

 

                                                                                                                                                                     한 향 순

 

사방이 짙푸른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에서 떨어지는

눈물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이 나라는 때 묻지 않은 자연풍광과 순박한 사람들의 미소가 아름다운 곳이다. 더구나 사람들로 복닥거리고 지저분한

남인도에 있다가 이곳에 오니 풍광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하여 정말 누구의 말처럼 천국처럼 느껴졌다.

옛날에 실론으로 불리던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지만 이슬람교도나 힌두교인들도 많아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기원전 236년 인도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불교가 전해지면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는데,

오늘까지 남아 있는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불교 유적들이 도처에서 지난날의 영화를 말해준다.

 

 

 

 

우리 일행은 먼저 시기리야(Sigiriya)락을 보기로 했다. 멀리 보이는 정글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는 바위 위의 왕궁이다.

스리랑카하면 떠오르는 세계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거대한 바위산 위에 왕궁과 궁궐 등 여러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주위의 숲과 상당히 대조적인 적갈색의 이 바위산은 높이가 195m로 하늘을 향해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는 기막힌 모양이다.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만든 주위의 해자는 당시의 화려하고 철옹성 같은 궁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해자를 건너 10분쯤 정원을 가로 질러 걸으면 실질적인 바위궁전을 오르게 된다.

이 바위산 꼭대기에 5세기 중엽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던 왕이 있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자는 동생 목갈라하나의 보복이 두려워 이 요새에 성을 쌓았다.

 

 

 

 

이 바위산 꼭대기에 5세기 중엽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던 왕이 있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자는 동생 목갈라하나의 보복이 두려워 이 요새에 성을 쌓았다.

가파른 돌계단을 한바탕 오르면 다시 바위벽을 따라 비스듬한 경사를 왼쪽에 담을 끼고 걷게 되는데,

이 담의 이름을 거울 벽 이라고 한다. 바위 쪽에 500 여인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해가 비추게 되면 그 그림들이 벽에 반영되었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지금은 엄격하게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2천여 계단 중에 이제 마지막 힘든 코스인 바위 철 계단 길을 따라 조심해서 올라가야 한다.

경사가 급한 바위를 사자 발톱 모양의 돌계단을 거쳐 거의 기다시피 하며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숱한 의문에 싸여 있는 궁궐의 흔적들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드디어 산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보이는 바위 위의 궁전연못과 석좌 등은 세상사가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의 보복을 피해 7년간 이 바위궁전에서 은거하던 왕도

결국 동생에게 참수 당했다고 하니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실감한다.

 

 

 

다음날은 캔디에서 군용트럭으로 4~5시간 걸리는 미무래 민속마을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길이 얼마나 험하면 군용트럭을 타야하는지 몰랐지만 트럭의 짐칸에 타고 덜컹거리며 비포장 길을 장시간을 이동하는 일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중간에 내려서 굽이굽이 겹쳐있는 산야도 바라보고 다랭이논도 구경하면서 갔는데

다리에 거머리가 붙어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곳에는 논도 아닌 풀밭에 거머리가 너무 많았다.

덜컹거리는 트럭을 타고 서너 시간을 달리니 세상과는 동떨어진 자그마한 오지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는 큰 나무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는데, 마을을 지켜주는 보호수인 것 같았다.

나무 안에는 불상도 있고 나무 둘레에는 오색 깃발도 둘러져있었다.

이 오지마을에는 토착원주민들이 400 여명 살고 있는데 거의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앞으로는 커다란 뾰족한 산이 보이는데, 바로 럭키 갈라산이다.

야자나무가 둘러싸인 마을은 문명의 발길이 적어 주민들이 옛날방식 그대로 살고 있었다.

전통마을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논농사 밭농사를 짓느라 노인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같이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오지마을 사람들은 힘든 여건 속에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고 이방인들을 반갑게 반겨주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마을을 돌다가 어울리지 않게 철제대문이 열려있기에 어떤 곳인가 싶어 살그머니 올라가 보니

 조그만 단층건물이었는데,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있는 것을 보니 학교인 듯 싶었다.

 

 

 

 

 

건물 안을 기웃거리니 마침 쉬는 시간인 듯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수줍어서 책상에 엎드리거나 시선을 피했다.

우리의 어린 시절, 낯선 손님을 보면 부끄러워서 이유도 없이 숨어들던 순수한 시절이 생각났다.

이곳 어린이들은 모두 흰 교복을 입고 시골아이 같지 않게 단정하고 깨끗하였으며

수줍어하면서도 우리를 보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의 잃어버린 순수한 감성을 자극하는 스리랑카. 조금 부족하고 불편한 것이

도리어 행복임을 알려주는 추억의 여행지. 그 따뜻한 기억속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여행문화 <2019년 7,8 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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