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의 봄
한 향 순
온 천지에 화사한 봄꽃이 무르익고 있는 봄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흐드러진 벚꽃과 봄 풍경을 촬영하기 위해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마침 개화시기를 잘 맞추어서 현충원에는 입구부터 연분홍빛 벚꽃들로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들보다는 봄꽃을 즐기러 나온 소풍객들로 부산스러웠다.
처음에는 눈이 부시게 만개한 수양벚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곳이 현충원이라는 것도 잊고
탄성을 지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눈으로 보이는 환상적인 풍경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잘 담을 수 있을까
고심을 하느라 일행들도 놓쳐버리고 말았다.
꽃길을 따라 점점 안으로 들어 오다보니 어느덧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장병들의 묘역이 있는 곳에까지 오게 되었다.
일렬로 정비된 묘역에는 육군 일등병부터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젊은 전사자들의 묘역이었다.
그때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곳이 꽃놀이 나온 공원이 아니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가져야하는 현충원이라는 자각이었다.
그리고 저기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은 지금도 얼마나 애태우며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친한 지인 중에 금쪽같은 아들을 군복무 중에 사고로 잃고, 아직도 기일이 되면
이십년이 넘도록 복무하던 부대로 찾아가 추모행사를 벌이는 사람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분의 아픔은 이십 년 전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고 한다.
하기는 청천벽력 같은 그때의 아픔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잘나고 훤칠하던 아들이 훈련 중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몸으로 수류탄 폭발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는 어떻게 혼절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다른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꽃다운 나이의 목숨을 버린 그 아들은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그런 소식을 들어야하는 부모의 참담한 심정을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기에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아픔은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함부로 판단하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오래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글 중에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많은 어느 전철 안에서 철부지 아이들이 신을 신은채로 의자에 기어오르며 떠들고 있더란다.
옆에는 아빠인 듯한 남자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옆에서 보다 못한 한 중년여인이 앙칼지게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아이들 교육이 아주 엉망이네요.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지 그렇게 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나무라더란다.
그랬더니 그 남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황망하게 아이들을 제지하며 “아 예 죄송합니다.
지금 저 아이들의 어미를 묻고 오는 길이라 제가 넋이 빠졌나 봅니다.”라고...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여인은 자기가 얼마나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남의 슬픔을 이해하기는커녕 그저 자기 잣대로 남을 폄하하거나 몰아붙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보니 현충원에는 화사한 봄날에도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 묵주를 돌리며 기도를 하고 계셨다.
그 할머니는 무슨 사연으로 이른 아침 이곳에 와서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일까 궁금해졌다.
혹시 이곳에 오래전에 묻힌 남편이나 아들을 위한 기도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늘은 그런 타인의 슬픔들을 사진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아름답고 예쁜 사진보다는 깊은 내면의 슬픔이 배어나오는 사진을 찍어 사람들과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애틋한 목련꽃들이 낙화한 모습이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처참하게 가지가 잘린
나무의 밑동이며 묵주기도를 드리는 할머니의 뒷모습들이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담겨있었다.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타인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세상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번에 세상을 놀라게 한 강원도 산불현장에서도 몇날 며칠을 잠도 못자고
위험을 감수하고 산불 현장을 지키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을 TV에서 보고 가슴이 멍해졌다.
서울현충원은 수양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현충문 앞에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소망기원벽화’행사와 현충원 묘역을 순례하는 행사를 연다.
그리고 후손과 연고가 없는 묘소를 돌보고 그분들을 추모하겠다는
‘온새미로 서약’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온새미로’는 ‘언제나 변함없이’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오늘은 봄꽃을 보러 나온 길에 잠시나마 순국선열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봄나들이 길이었다.
(읽기 편하기 위해 문단을 임의로 바꿨습니다)
< 계간수필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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